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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훈장의 뒤돌아 보기

어떻게 말하는 것이 현명한 대답이었을까?

 

내가 교직생활을 처음 시작하던 '74년 2학기의 일이었다.

나는 영어를 가르치던 황진구 선생과 한 방을 쓰며 하숙을 하고 있었다.

황선생은 나보다 3세쯤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 나와는 얘기가 통하여 절친하게 지내고 있는 사이였다.

중앙정보부에 의한 동아일보 탄압이 극에 달하고 있을 때였다.

 

황선생이 문제지 맨 끝에 오늘날 학생이 가져야 할 각오에 대하여 쓰라는 문제 아닌 문제를 맨 끝에 적어서 출제하였다.

다양한 의견들이 표출되었는 데 그 중 한 학생의 서술이 황선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황선생이 나에게 "이 글 좀 읽어 봐" 라고 말했다.

나는 박*섭이라는 2학년 학생이 쓴 글을 읽어 보았다.

20년 전의 일이라 정확히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동아일보 사태를 규탄한다. 언론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정부의 비겁한 행동은 시정되어야 한다"

이런 내용이 답안지의 맨 끝에 영어선생님이 문제와 관계없이 출제한 문항의 답으로 적혀 있었다.

나는 황선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섭이가 한 말이 옳지 않소. 그런데 이 말은 우리 둘만이 알아야 할 말이오"

황선생이 채점한 점수는 64점인가 되었다.

황선생은 색연필로 64를 지우더니 80으로 고쳤다.

나와 황선생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큰소리로 웃었다.

속이 후련하였다.

 

'84년도 가을이었다. 탄광지대인 고한여중에서 근무할 때였다.

전두환정권의 군사통치의 여러 모순이 노정되면서 전 두환 군사정권의 강권통치가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학생들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가열되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역대정권이 그러하여 왔듯이 학생들을 좌경이니 용공이니 하면서 민주화 요구를 공산주의자들의 사주를 받은 사회 혼란 조장 행위로 몰아붙여 가는 시기였다.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 중 과격한 장면만을 화면에 방영함으로 국민들의 여론을 오도하여 민주화 시위가 국민들의 여론과 격리되도록 하는 언론 조작이 한창일 때였다.

과학 수업 중 한 학생이 질문을 하였다. "선생님은 요즈음 대학생들의 데모를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나는 갑자기 대답할 말이 없었다.

학생들의 시위가 틀렸다고는 내 양심상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고 그렇다고 해서 학생들의 요구가 옳다고는 당시의 상황으

로는 교실에서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잠시 학생의 질문에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한가지 나름대로의 명답이 생각이 났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시대에 이루어지는 행위는 그 시대에 판단이 가능한 것도 있지만 시간이 지난 후 역사가 판단하여 주어야 하는 부분도 있다. 오늘날 학생들의 시위에 대한 판단은 역사가 할 것이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87년 봄이었다. 그 때는 춘천여중에서 근무할 때였다. 전두환 대통령이 고뇌에 찬 결단으로 발표한 4.13조치에 대한 항의와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연일 크게 벌어질 때였다.

춘여중은 강원대학교 가까이 있어 옥상에 올라가면 학생들이 정문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시위하는 모습이 보였고 소위 기관원이라는 사복 아저씨들이 옥상에서 강원대 쪽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는 일도 있었다.

등하교 길에는 최루탄 냄새가 아스팔트 위에 배어 있어서 눈물을 흘려야 될 때도 있었고 풍향에 따라 교실에까지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도달하여서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억지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등교할 때 최루탄 냄새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학생들에게 그냥 울지말고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며 울으라고 농담아닌 농담을 한 때도 있었다.

 

그 때의 수업시간 중 어느 학생이 내가 고한에서 당했던 것과 같은 내용의 질문을 하였다.

"선생님은 요즈음 대학생들이 데모하고 하는 데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나는 고한에서와 마찬가지의 갈등에 직면하였다. 사실 그대로 내 견해를 피력한다면 학생 중 누가 집에 가서 이것을 말하고

또,이 사실이 정보기관에 알려지면 곤욕을 치를 것이고 그렇다고 그들의 편에 서서 학생들의 시위를 비난할 생각은 더우기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나에게 태종 임금과 원천석 선생의 일화가 생각났다.

태종은 자기의 스승이기도했던 원천석 선생을 벼슬에 모시기 위해 태종이 직접 원천석 선생이 은거하던 치악산까지 찾아갔다.

원천석 선생은 태종을 피해 산으로 달아났는 데 달아나다가 갈림길에서 연못에서 빨래를 하던 노파를 만났다.

선생은 노파에게 누가 내가 어느 길로 갔느냐고 묻는다면 나를 보지 못하였다고 말해 달라고 하고 산 속으로 피신하였다.

조금 있다가 태종의 일행이 뒤따라 와 노파에게 선생이 간 길을 알려 달라고 하였다.

노파는 임금을 속일 수도 없고 선생과의 약조도 저버릴 수 없는 딜렘마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잠시 일을 멈추고 침묵을 지키던 노파는 연못에 몸을 던져 죽어버리고 말았다.

지금의 내 심정도 그 노파의 심정과 같다. 나는 이 말로 학생의 물음에 답을 대신하였다.

질문을 한 학생이 내 말 뜻을 이해했는 지 그 시간에 수업을 받던 학생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이제 교직생활 20년을 맞이하며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을 한 것이 현명하였을까?

용기 있게 진실을 말하여야 했을까? 그리고 나를 불살라 버렸어야 했을까?

아니면 위와 같은 선문답(禪問答)으로 내 진심을 말했야 했을까?

아니면 아무 대답도 하지 말고 질문을 한 학생에게 수업과 관계 없는 질문이라고 일축하고 대답을 회피하여야 했을까?

어느 것이 현명한 행동이었을까? 나는 지금도 그 답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1994년 어느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