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훈장의 뒤돌아보기(2) - 발령을 받고 임지로
앞에서도 썼지만 교사가 되겠다는 희망은 대입에 실패를 하고 현실을 깨달아 가며 변질되게 되었다.
부친이 교사여서 경제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서울 사립대에 갈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접게 된다.
강대 사대가 새로 생겼지만 일부러 농화학과로 진학하였다.
농대에는 다섯개 과가 있었는 데 주진복이를 만나서 물어 보니 농화학과가 좋다고 해서(진복이는 농화학과에 다니고 있었음) 농화학과에 원서를 내게 되었다.
예비고사 첫해라 강대 농화학과는 미달이어서 무난히 입학할 수 있었다.
입학후 곽판주 교수님(토양학과 비료학을 가르침)이 국가가 주는 자격증은 가능한 한 받는 것이 좋다고 조언을 하셔서 교직과목을 신청하게 되었다.
4년간 20학점을 이수하면 2급 정교사 자격증을 받을 수 있었다.
교육원리, 교욱사, 교육심리 등 한 학기에 한 과목씩 이수하고 교생실습을 하면 자격증을 주었다.
(지금은 사범대학이 아니면 10% 이내의 성적을 취득하여야 교직과정을 신청할 수 있다고 한다)
당시 병역을 필하지 않으면 일반 직장에 취직하기가 어려웠다.
2학년때 부친이 갑자기 별세를 하셔서 중간에 군에 다녀올 형편이 되지 못하여서 졸업까지 연기를 하다 보니 취직할 곳이 마땅하지 않았다. '73년 군에 입대를 했으나 건강 문제로 논산훈련소에서 귀향 조치를 당하고 신체검사를 다시 하여 재입대를 해야 하는 데 1년이 넘도록 기다려야 하는 것이 문제였다.
당시 집안 형편은 빨리 취업을 해야 할 처지였다.
일반 기업의 취업이 병역 문제로 어렵게 되자 대안으로 교직을 선택하게 되엇다.
그렇지만 '농화학'이라는 과목으로 선발을 하는 곳이 없었다.
경상북도에서 농화학을 4명 뽑는다고 공고가 났다.
'73년 12월 대구에 가서 시험을 보았다. 10:1의 경쟁이었지만 운이 좋와 1등으로 합격을 하였다.
다음 해 3월이 되어 발령을 기다렸지만 발령이 나지 않았다.
우체부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지만 발령 소식은 오지 않앗다.
경상북도 교육위원회에 문의하니 기다리라고만 한다.
발령을 기다린지 석달이 지났다.
실업자 노릇을 하려니 밥을 먹는 것이 모래알을 씹는 기분이었다.
지금 많은 젊은이들이 장수생이 되어 취업준비를 하는 데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할까를 이 경험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5월 하순 당시 초등학교 교감이시던 사촌형님이 강원일보를 가지고 오셨다.
교사를 모집하는 데 화학과로 농화학 전공자도 지원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화학과로 채용되어 근무하고 있는 같은 서클 출신 후배 여교사를 만나 순위고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 공부를 시작했다.
5월 28일에 도교육위원회에서 전보가 왔다.
수학과로 임용 예정이니 도교육위원회에 출두하라는 내용이었다.
다음 날 도교육위원회에 가니 김한기 장학사라는 분이 나를 면접하였다.
김한기 장학사는 검정고시로 수학교사가 되어 정선 임계중학교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강릉고등학교 입시에서 어느 수학문제를 대부분의 학생이 풀지 못하는 데 한 학생이 푸는 모습을 보고 순시를 하던 교장이 출신학교를 알아보니 산골인 정선 임계중학교 출신인 것이계기가 되어 강릉고등학교로 발탁되었다는 분이었다.
김한기 장학사는 지금 수학교사가 부족하고 화학과의 경우는 경쟁 시험을 보아야 하고 발령이 나려면 기다려야 하니 수학과로 가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가능하다고 했더니 3학년 수학 교과서를 주면서 한 시간 수업할 분량의 지도안을 써보라고 했다.
나는 수학 과외를 한 경험이 있는지라 한 시간 수업 분량의 지도안을 써냈더니 김한기 장학사는 고등학교로 발령을 내주겠다고 한다.
나는 학기 중이라 고등학교는 어렵고 중학교로 가겠다고 하니 몇개 학교를 제시하며 선택을 하라고 한다.
마침 모교인 양구중학교에 수학교사가 결원이어서 과목 상치로 양구중학교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당시는 베이붐 시대의 학생들이 중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어 중등교사가 부족하였다.
사범대 출신들을 강원도로 발령을 내면 대부분 자격증을 반환하고 부임을 하지 않았다.
강대 사대도 졸업생이 막 배출되기 시작한 때여서 특히 수학교사가 부족했다.
이런 관계로 화학과를 지원한 내가 수학과로 발령을 받게 된 것이다.
도교육위원회 사무실에는 교사를 빨리 보내달라고 재촉하는 전화가 계속 걸려오고 있엇다.
양구중학교에서도 교사를 빨리 보내달라는 재촉이 오자 김한기 장학사는 아주 우수한 교사를 즉시 보내주겠다고 했다.
김장학사는 내일까지 서류를 갖추어 오라고 했다.
서둘러 채용신체검사를 하고 서류를 갖추어 도교육위원회로 가니 즉시 발령을 내주며 당일로 양구 교육청으로 가서 보고를 하라고 한다.
준비 때문에 하루 시간을 달라고 하니 김장학사는 "빨리 가라면 갔지 무슨 이유가 많으냐고 하며 당장 지금 부임하라고 재촉을 한다"
나는 서둘러 집으로 와서 짐을 챙겼다.
양구에 이모댁이 있으니 임시로 이모댁에서 머물기로 했다.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가야 하는 데 문제는 넥타이를 맬 줄 모르는 것이었다.
옆방에 세들어 살던 화전민 출신 아주머니가 넥타이를 가지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다가(여자들만 있어 맬 줄 모르는 집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어느 집에서 겨우 넥타이를 매어 가지고 왔다.
이것을 목에 걸고 트렁크를 들고 양구행 버스를 탔다.
청운의 큰 뜻을 품고 춘천으로 나온지 9년만에 교사가 되어 다시 모교로 돌아가게 되었다.
양구 교육청에 들려서 양구 중학교로 발령을 받고 학교로 부임하였다.
양순석 선생님(사회를 가르치던 분으로 노인네라는 별명이 있었음)이 교감이었는 데 제자라고 하니 반갑게 맞아 주었다.
다음 날 부임 인사를 하고 수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내 출근부가 없었다.
교무과장 선생님께 물어 보니 6월 1일 발령인데 오늘이 5월 30일이니 이틀간 서비스로 수업을 하라고 한다.
법적인 내용을 잘 모르니 나는 시키는대로 교실에 들어가서 수업을 시작하였다.
5월 30일과 31일 이틀간은 보수도 없이 법적 자격도 없이 수업을 한 셈이 된다.
부임하여 보니 교사가 없어 3월부터 석달간을 수업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강원대 교생이 6주간 교생으로 와서 가르치고 간 후는 수학 수업을 받지 못하고 다른 과목으로 자습을 하고 있었으니 학교에서는 한 시간이 급했을 것이다.
순위고사(당시는 채용시험을 순위고사라고 함) 원서를 내자마자 발령장을 받고 즉시 부임하라는 엄명을 받아 부임을 하고 발령 날짜도 되기 전에 수업을 한 예는 나말고는 거의 없을 것이다.
당시 수학 교사가 워낙 부족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로, 수십대 일의 경쟁율은 기본인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라 아니할 수 없다.
베이붐 시대의 출생아들이 중학교로 몰려 오기 시작하자 교사가 부족한 덕분에 과목상치로 교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고등학교때의 꿈이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제자리를 찾아 이루어지게 되었다.
다음 회부터는 교직생활을 하며 겪었던 에피소드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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