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골훈장의 뒤돌아 보기

시골 훈장 뒤돌아 보기(1) - 교사가 희망인 소년

아래의 글은 춘천고등학교 40회 동창회 카페에 기고했던 글임.

--------------------------------------------------------------

 

교사로 발령받은지 37년이 되어 간다.

한달 후인 2월에 명예퇴임을 앞두고 있으니 남은 날이 몇날 되지 않는다.

 

퇴임 인사는 전교생이 다 등교하는 종업식때 해달라고 하니 학교에 매인 날은 20여일밖에 남지 않았다.

 

방학이고 갈참이라 근무도 모두 빼어주어 방학 중 보충수업(안해도 되지만 자원해서 참석한)이 끝나자 집에서 쉬며 퇴임 후의 예행연습을 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37년간의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간 느낌이 든다.

조금 전 갑자기 37년간의 교직 생활 중 기억이 나는 것을 기록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교직에 종사하지 않은 대부분의 친구들은 내 글을 통해 지난 학창시절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

 

 

1. 고교 시절의 희망은 교사가 되는 것

 

 

필자의 선친은 초등학교 교사였다.

 

그러다 보니 나의 가장 오랜 추억은 학교와 관련이 되는 것들이다.

단편적으로 기억나는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이 학교 건설 현장의 기억이다.

아마 피난을 갔다 돌아와서 새로 학교를 지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학교를 짓는 데 쓰는 목재를 나르는 모습같은 것을 본 것이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어려서 나는 굉장히 편식을 하고 몸이 허약하였다.

고기를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이기에 육식을 시킬 수는 없었고

초등학교 학생들이 잡아다 주는 개구리와 물고기 등을 구워 먹던 기억이 난다.

 

아마 선친께서 나를 먹이려고 개구리나 물고기 등을 잡으면 갔다 달라고 했을 것이고 순박했던 학생들은 선생님의 허약한 아들을 위해 기꺼이 개구리나 물고기를 잡아 왔을 것이다.

지금 같으면 인터넷에 떴을 이야기지만 근 60년전이라 가능했을 것이다.

 

어린시절 학교 관사에서 살았다. 나중에 집을 소유하고 살았지만 우리집 생활의 중심은 학교였다.

이런 성장 환경이 자연스럽게 교사가 되는 것을 희망하게 하였을 것이다.

 

초등교사였던 부친을 따라 평창에서 속초로, 속초에서 양양군 현북면에 있던 장리분교로, 이곳에서 양구로 전학을 다니며 네번째 학교에서 초등학교 졸업을 하게 되었다.

이때 같이 졸업한 친구들이 정효섭이와 김도영이다.

 

춘중으로 진학할 줄 알고 공부를 했지만 막상 원서를 보니 양구중학교의 원서여서 이불 속에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

효섭이와 반장이던 이종승이, 1년을 묵었던 정준섭이는 춘중으로 진학을 하고 나와 도영이 등은 양구중학교로 진학을 했다.

양구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춘천으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

 

이때 같이 춘천으로 나온 친구들이 박제호, 김종성(초등학교서 근무), 권석봉, 최무성(양구 동면 면장 역임), 신명철, 임현간 등이다.

 

입학하자 인문계 고등학교라 그런지 선생님들도 대학진학을 강조했고, 친구들 전부가 대학에 진학을 한다고 했다.

희망 대학을 조사했는 데 아마 과반수 이상이 서울대를 지망한다고 했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오자 현실을 보는 눈이 조금은 생기고, 아버지의 직업에 대해 비판적 안목도 생기었다.

동생이 다섯이나 되고, 아버지의 봉급에 주로 의존해서 살다보니 경제 상황이 열악했고, 이런 까닭으로 돈을 잘버는 직업을 택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는 공대나 상대를 나와야 돈을 잘벌었기 때문에 희망대학을 서울대 상대로 써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러나, 곧 서울대 상대를 간다는 것이 내게는 허황된(?) 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2학년쯤 되자 다시 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 국어과목이 가장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목표 학교와 학과가 서울대 사대 국어교육과가 되었다(당시에 사범대학은 서울대, 경북대, 공주사대밖에 없었고, 공주와 대구는 너무 먼 곳으로 생각되어 사범대로 생각할 수 있는 곳이 서울대였다)

 

3학년 2학기가 되어 "00계의 선배님께"라는 교지에 실릴 원고를 쓰라는 선생님의 지엄하신(?) 명령이 있어 나도 졸문을 한편 써낸 것이 교지에 실리게 되었다.

 

이때 '政界의 선배님께'는 김철해가, '언론계의 선배님께'는 김정욱이가, '교육계의 선배님께'는 내가 원고를 내었는 데 철해와 정욱이 모두 교사로 사회생활을 출발했지만 철해는 목사가 되고, 정욱이도 일찍 교직을 떠나 결국 선배님께 드린 약속을 지키지 못한 셈이 되었다.

 

 

큰 꿈을 품고 경춘선 열차를 타고 서울에 시험을 보러 갔던 나는 낙방이라는 쓴 잔을 마시고 1년을 재수를 하게 되었다.

 

학원을 갈 형편은 되지 못하고, 처음에는 김진서와 같이 도서관을 다니기도 하다가 진서가 서울로 올라가자 혼자 남게 되고 의지력이 부족해서인지 다부지게 공부도 못하고 허송세월을 하다가 찬바람이 나서 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만회하기에는 늦었고 사립대를 가려니 집에서는 보낼 수가 없다고 하였고

 

마침 강원대에 사범대가 생겼지만 내가 서울에 가서 재수를 못한 것은 집안 형편 때문인데 이것이 교사가 가난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나는 일부러 사범대를 가지 않고 농대 농화학과를 가게 되었다.

이때 교사를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입학후 토양학을 가르치신 곽판주 교수님이 국가가 주는 자격증은 가능한 취득하라고 하여서 교직과목을 신청하였더니 교사 자격증을 받게 되었고, 이것이 교직에 입문한 동기가 되었다.

 

==========================

 

 

아래는 1967년 춘천고등학교 교지인 소양강 17호에 실었던 졸고다.

 

퇴임을 앞두고 교사를 꿈꾸었던 시절 가졌던 교직을 지망한 동기의 몇%나 이루었는지, 그때 가졌던 문제의식을 개선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생각하면 부끄러운 마음뿐이다.

 

------------------------------------------

 

 

"교육계에서 활동하시는 선배님께"

 

선배님! 선배님께서 교육을 위해 헌신 노력하신다는 소식은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선배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교육은 사회의 모둔 분야 중에서 어느 분야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세 국민들을 가르치는 일처럼 聖스러운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이 국가의 장래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말이 더욱 실감됩니다.

 

나이 어린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선배님께서 輕薄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이 사회는 어디엔가 분명 병이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극도의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이익을 위하여서는 남을, 공익을 희생시켜도 좋다는 사고방식이 사회에 가득 차 있으며 세상 인심은 점점 각박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의 부조리를 시정하는 길은 교육,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에서 참다운 인간을 기르지 못한다면 어찌 참다운 사회가 되기를 기대하겠습니까?

그러기에 저는 자기의 이익을 弊履(폐리-헌신발)처럼 던져 버리고 2세 교육을 위하여 不徹晝夜로 奮鬪努力하시는 선배님을 존경하오며, 저도 선배님의 뒤를 따를 것을 다시 한번 결심합니다.

 

사회의 병든 풍조가 학원에까지 浸透했다는 것은 실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67년 2월 0일 D일보의 만화에서 수험생을 돈뭉치라고 표현한 것을 보았을 때 온몸이 오싹해지는 戰慄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난한 학생들의 주머니를 털어 치부하는 학원기업 모리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온 국민들은 마땅히 이들을 규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先人들이 피와 땀으로 이룩한 학문을 상품화하는 學館이라는 것을(물론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증오합니다.

 

본래 참다운 인간을 만드는 교육이 시험 준비를 위한 교육으로 타락해 가고 있음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격이 갖추어지지 않고 잔 지식만이 있음은 미치광이가 칼을 들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흔히 신성한 교직을 할 일이 없어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때 궁여지책으로 택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큰 오류입니까?

 

지금 사회는 캄캄한 어두움에 덮여 있습니다.

이 어두움의 迷路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갈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어두움을 밝히고 미로에서 헤매는 이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교육 하나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선배님의 위대하신 뜻을 이어받아 어두움을 밝히는 조그만 등불이 되겠습니다.

세찬 바람이 불어도 결코 꺼지지 않겠습니다.

(1967년 10월) 

================================================================

 

<뱀다리> 서가를 정리하다가 어느 곳에 꽂혀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던 모교의 교지 소양강 17호를 오랜만에 재발견(?) 하고,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 보았네.

44년이 지난 지금의 현실과 그 당시의 현실이 반세기의 시간차가 나는 데 너무 비슷하다는 것이 놀랍고 그때의 문제점이 하나도 개선되지 못했다는 것이 놀랍네.

 

그리고, 나는 내가 한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내몸 하나 추스리기에 급급하다가 세월만 보내고 나오는 것이 부끄럽고...

 

앞으로 나의 부끄러운 고백은 이어질 것이네.

 

2011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