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수리하려고 책 정리를 하다가 오래 된 편지 한통을 발견하였다.
1983년 횡성을 떠나 탄광지대인 정선 고한여중으로 부임하여 갔을 때 가장 먼저 받은 편지로 신 하사라는 분이 보낸 것이었다.
이 편지 겉봉을 보면서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신 하사라는 분이 생각났다.
당시 횡성 갑천에서 사는 사람치고 신 하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분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사람들은 모두 신 하사라고 그를 부르고 있었다. 군에서 하사로 제대를 하였기 때문에 불리게 된 것인데 제대를 한 후 50대 중후반의 나이가 되도록 신 하사라고 불리고 있었다.
신 하사는 '83년 당시 나이가 50대 중후반으로 추정되었으나 본인 자신도 정확한 나이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휴전 무렵 군에 입대하여 하사로 제대하였다고 하는 것 외에는 신상에 대하여 거의 알려진 사실이 없다. 그분은 항상 남루한 신사복을 입고 다녔다. 겨울에는 그 위에 외투 한 벌을 걸친 그런 차림이었다. 처자도 없고 집도 없이 혼자서 생활하는 분이었다.
그분의 생활공간은 일정하였다. 횡성 갑천과 청일, 홍천 서석이 그분이 활동하는 영역이었다. 심성이 무척 착한 분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였지만 어린아이와 같은 사고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 정상적인 사회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원래는 꽤 잘사는 부자였다고 하는 데 그의 순수함을 악용하여 친척이 모든 재산을 사취하여 빈털터리가 되었다고 한다. 또, 결혼도 하여 딸 하나를 두었었는데 어떤 남자가 그의 아내를 꼬여서 아이까지 데리고 도망을 갔다고 한다. 그 후 신 하사는 쭉 혼자서 생활하여 오고 있었다. 신 하사는 어린 아동 수준의 사고를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정확한 나이가 몇 살인지도 모르고 있었지만 군번만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군번을 물으면 아주 자랑스럽게 정확한 군번을 대답하였다.
신 하사는 가끔 학교 교무실에도 들렸다. 하루는 그곳이 고향인 교감선생님이 신 하사에게 군 생활에 대하여 물었다.
토막토막 말하는 내용을 종합하면 제주도 훈련소에 갔었는데 훈련을 받을 때 처음에는 이른바 빠따를 많이 맞았다고 한다.
훈련이 끝나고 부대에 배치되어서는 제대할 때까지 산에서 숯을 굽는 일을 하였다고 하였다.
교감선생님의 보충설명에 의하면 신 하사는 휴전 무렵 군에 입대하였는데 처음에는 그의 미숙함 때문에 훈련을 받을 때 매를 많이 맞았지만 고문관으로 인정되어 부대에 배치된 후 후생사업(휴전 직후 군에서 벌목 사업 등 돈벌이를 하여 부대 운영비도 충당하고 장교들 복지에 쓰기도 하고 지휘관이 착복하기도 하였다는 군에서 벌인 경제 사업을 말함)으로 하는 숯 굽기 인부로 군 생활을 하다가 하사(지금의 병장)로 제대를 하였고, 제대 후 고향으로 돌아 온 후에는 신 하사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신 하사를 좋아하는 까닭은 그가 비록 남루한 옷을 입고 다니고 사고 수준이 낮지만 마음이 순수하고 착하였고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과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다.
또, 신 하사는 누가 음식을 제공하면 마당이라도 쓸어 주고 가지 절대고 공짜 밥을 먹지 않았다. 일을 잘하는 신 하사는 젊은 시절에는 농번기에는 모내기, 김매기 등 농사일을 도와주고 식사를 제공받았다고 한다. 또, 잔치집이나 초상집에서 허드레 일을 하여 주고 밥을 얻어먹었다고 한다.
겨울에 신 하사를 먹여 살린 사람들은 술집 여자들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시골 면소재지 등에는 아가씨를 몇 명씩 둔 꽤 큰 술집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겨울에 신 하사를 먹여 살렸다고 한다.
나는 그때 그 말을 듣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깊은 감동을 느꼈다.
가장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것을.
물론, 신 하사가 겨울에 술집에 머무르며 나무도 패고(당시에는 시골에서 나무를 때는 집이 많았음) 물도 긷고 하는 허드렛일을 도와주었겠지만 술집 아가씨들은 단순히 그가 제공하는 노동력 때문에 그를 겨울동안 돌보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가 신 하사를 만났을 때는 이미 50대 후반이 되어 젊은 시절처럼 이곳저곳 불려 다니며 일을 해주고 식생활을 해결하는 일은 어렵게 되었을 때다. 식사 때가 되면 마음속으로 정한 집 앞에 가서 어슬렁대면 인심 좋은 시골이라 그를 본 집에서는 그를 불러 밥을 주고, 밥을 먹은 그는 빗자루로 마당을 쓸어 주거나 물을 길어다 주고 다른 곳으로 떠났다. 신 하사는 갑천, 청일, 서석 지역을 다녔기 때문에 한번 갔던 집을 자주 방문하지는 않았다.
한번은 식사시간이 되었는데 그가 우리 집 마당에 와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나와 아내는 그를 불러 식사를 제공하였고 그는 집 마당을 쓸어 주고 갔다. 그 뒤 몇 번 우리집 앞에 왔었는데 그때마다 음식을 제공하였지만 횟수는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83년 3월 인사이동 때 갑천을 떠나서 정선 고한여중으로 이동하였다. 며칠 후 신00이라는 낯선 이름이 적힌 편지를 받았다. 고한 여중으로 간 후 처음 받은 편지였다. 겉봉의 주소를 보니 횡성 갑천으로 되어 있었다. 신00가 누구인가 궁금하게 생각하며 편지를 뜯어보았다. 내용을 보니 뜻밖에 신 하사가 보낸 편지였다. 자신이 배가 고플 때 밥을 주어서 고마왔다고. 고한에서 잘 지내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 편지를 받고 눈물이 핑 돌았다. 몇번 친절을 베푼 일도 없는 데 과분한 인사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 하사의 본명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그 편지가 나에게 오기까지 과정을 생각하면 더욱 감동적이었다.
신 하사는 내가 전근을 갔다는 소식을 듣고 누구에겐가 대필을 해줄 사람을 물색하여 부탁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편지가 나에게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거가 일정하지 않으니 답장을 보낼 수도 없었다. 그 후 춘천으로 전근을 왔을 때 내가 입던 겨울 옷 몇 벌을 챙겨 신 하사에게 전해달라고 횡성 갑천의 세 들어 살던 집으로 보낸 일이 있었다. 그리고 20년 가까이 신 하사를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편지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지금 '70대 중반은 되었을 터인데 아직 생존해 있을까? 그분이 생존하여 있다면 어린아이 같은 천진한 웃음과 순수한 모습을 보고 싶다.
2004. 3. 7 박철 목사의 느릿느릿 사이트에 올렸던 글
후일담.
2007년 마지막으로 근무한 홍천 서석중학교에 부임하였고, 전에 근무하였던 갑천이 가깝기 때문에
갑천에 살 때 세들어 살았었던 안집을 방문하여 하루를 묵으며 지난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아저씨께 신하사의 소식을 물었더니 몇년전 작고하였다고 했다.
연로하여지자 시설에 들어가서 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생전에 한번 더 만나지 못했던 것이 깊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5일에 한번씩 서는 서석 장날 오랫동안 장날이면 서석에 와서 장사를 하는 분에게 신하사에 대해 물었더니 신하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신하사에 대한 추억은 글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가 잊혀져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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