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는 교육의 수단으로 허용되던 체벌이 지금은 폭력으로 규정되었다.
교사가 학생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군의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행하던 훈육이나 규율을 명분으로 한 체벌이나 기합은 폭력으로 규정되어 심한 경우 그 가해자가 처벌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확실히 군이나 학교에서 체벌은 대폭 감소되었고,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회의 분위기가 체벌을 허용하지 않고 폭력으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어 가고 있는 데 가정 내에서 아내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폭력에 대한 기사는 점점 늘어가고 있다.
가정에서 아동에 대한 심한 체벌로 인한 폭력이나 부부간의 다툼에서 아내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한세대 전에는 지금보다 더 허용되는 분위기였을 것이고, 더 자주 발생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데 당시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 왜 지금은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을까?
전에는 자녀에 대한 훈계의 수단으로, 부부간의 갈등의 표현으로 이해되고 가정내 문제로 인식되던 아동에 대한 체벌이나 남편이 아내에게 행한 폭력 행사가 지금은 폭력으로 규정되어 사회문제화되어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폭력으로 인한 상해의 정도가 전보다 극심하여져서 신체적 정신적 상해를 크게 입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원인도 클 것이다.
신혼때였던 '76년에 여성동아라는 잡지에서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김우기라는 소아과 의사가 쓴 글에서 읽은 것으로 기억된다.
워낙 인상깊게 읽은 글이라 40년이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지금도 그 내용이 기억된다.
김박사는 미국에서 가정폭력으로 인하여 상해를 입은 어린이들이 병원에 많이 온다고 했다.
주로 부모에게 폭행을 당해 심한 상처를 입은 경우가 많다고 했다. 나는 이 기사를 읽으며 인권의식이 보편화되어 있다는 미국에서 어린이 대상 폭력이 행사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김박사는 우리나라에서는 부모가 어린이들을 많이 혼내주지만 폭력으로 병원에 오는 사례는 아주 적다고 했다.
물론 40여년전인 당시에는 웬만큼 아파서는 병원에 가지 않던 시대기는 했지만 김박사는 우리나라에서도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부모의 폭행이 있지만 상해가 의외로 적은 점이 의아하게 생각되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 가족제도에서 그 답을 찾았다고 했다.
'60-'70년대까지만 해도 대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대가족제도가 일반적이었다.
부모와 더불어 할아버지 할머니와 미혼의 고모 삼촌 등이 함께 사는 경우가 많았다.
어린이들이 잘못하여 부모에게 혼나는 경우 정도가 심하다고 생각되면 할아버지와 할머니나 고모 삼촌 등이 개입하여 심한 폭행으로 진행되는 것을 막았었다.
필자의 경우도 아이들을 심하게 나무르려고 하면 어머니(아이들의 할머니)가 만류를 하셨다.
아이들이 어려서 그런 것인데 심하게 질책하느냐고 하시면서 아이들의 편이 되어 주셨다.
어머니의 질책을 듣고 나면 감정이 누그러지기도 하고, 나의 태도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되어 더 이상의 체벌은 없게 되었다.
다른 가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부모가 질책하는 정도가 도를 넘으면 가족 중의 누군가가 개입하여 만류하였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혼나서 울거나 마음이 상해 있으면 조부모나 삼촌이나 고모가 다독거려 주어 아이들의 감정을 풀어 주었다.
이러한 대가족내에서 다른 가족의 지지는 아이들이 부모에게 입은 상처를 치유하여 주어 정서적으로도 긍정적인 효과를 주었을 것이다.
또, 부모가 심하게 나무랄 경우 아이들은 조부모나 삼촌 고모 등에게로 피해 가서 심한 벌을 면할 수도 있었고, 이들 가족들의 중재로 부모에게 잘못을 빌어 체벌을 받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부모와 자식만의 핵가족으로 산다고 해도 이웃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시골의 가옥 구조는 지금과 같이 밀폐되어 있지 않고 개방적이었다.
울타리와 대문이 있었지만 집과 집 사이, 안과 밖 사이를 경계짓는 기능만을 하였을 뿐이고 밖에서 집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이나 이웃집에서는 그 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언제든지 알 수 있었다.
지금 세대의 젊은 사람들이 생각하면 사생활이 보장되어 있지 않아 불편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이웃집 사정을 손금 들여다 보듯 잘알고 있었다.
집안에서 아이들이 부모에게 심하게 혼나는 경우 아이들은 울부짖게 되고, 이 소리를 들은 이웃집은 그 집으로 달려가서 혼내주는 것을 만류하게 된다. 부모의 감정이 풀어지지 않은 경우 이웃집에서 아이들을 데려다가 부모의 감정이 풀릴 때까지 보호해 주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집안 내에서 부모 이외의 다른 가족들과 이웃집이 심한 체벌이나 폭행이 아이들에게 가해질 경우 개입을 하였기 때문에 아이들이 가정 폭력으로 심한 상처를 입는 경우가 없었던 것이다.
부부싸움으로 남편이 아내에게 가하는 폭력의 경우도 어린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른 가족이나 이웃의 개입으로 방지되었다.
필자가 어렸을 때에 이웃에서 부부싸움을 하는 경우를 여러 차례 목격하였다.
말다툼의 단계를 넘어 남편이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단계에 이르면 이웃 어른들이 개입하여 남편을 제지하여 폭행을 막았다.
또 악을 쓰며 덤비는 아내를 이웃의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이 데리고 가서 남편과 격리시킴으로 감정이 격앙되는 것을 방지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남편의 아내에 대한 심한 폭력도 상당부분 억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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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 문화가 바뀌면서 도시에서는 아파트 생활이 일반화되고, 농촌의 주택 구조도 밀폐된 구조로 바뀌면서 이웃이 어떻게 사는지를 알 수 없게 되었다.
가족 구조도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바뀌면서 부부와 자녀만이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다른 가족과 이웃과 단절이 되면서 가정내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었다.
부부간에 폭력이 행사되거나 부모가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심한 경우 자식이 노부모에게 폭력을 행사하여도 이웃이나 형제 등이 알 수 없게 되었다.
감정이 제어되지 않고 상승효과를 일으키는 폭력은 당하는 약자에게 심한 신체적 정신적 상해를 입히게 되었다.
말려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김우기 박사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미국에서의 가족제도나 주거환경이 한세대도 지나지 않아 우리나라가 뒤따르게 되었고
김박사가 보았던 우리나라의 가족제도나 주거환경은 이제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김박사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목격하였던 가족간 폭력 문제가 크게 대두되어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제도도 완벽한 것은 없다. 장점과 단점이 있고 빛과 그림자가 있게 마련이다.
불편하게 생각하였던 대가족제도나 개방된 주거구조도 장점이 있었고, 개인의 사생활이 보호되는 핵가족 제도나 밀폐형 주거 구조도 단점과 그림자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가정폭력을 보면서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2013.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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