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을 하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
하루는 노루 한마리가 학교에 들어 왔다. 군인들이 훈련을 나갔다가 노루 한마리를 생포한 것이다.
군인들은 노루를 잡으면 재수가 나쁘다고 하여 노루를 잡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생포한 노루를 학교에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다 큰 것은 아니지만 사춘기는 지난 노루였다.
당시 고등학교에는 농과와 축산과가 있었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꿩과 닭, 소 등을 기르고 있었다.
노루는 축사에 들어 갔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노루가 죽어 있었다고 한다.
야생에서 살던 놈을 우리에 가두었으니 노루도 답답하였을 것이다.
그보다 노루가 잡힐 때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순순히 사람을 따라 왔을 리는 없을 것이고 도망을 다니다가 잡혔을 것은 뻔한데 잡힐 때 상처를 입었으리라.
학교에서 기증한 군부대에 연락을 하니 알아서 처리를 하라고 했다.
축산을 담당한 선생님들이 노루를 잡았다.
저녁에는 노루고기를 삶아서 안주를 한 파티가 열렸다.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한다고 버텼었는 데 그만 노루고기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술을 마셨다.
선배들은 "어 경선생이 전혀 술을 못마신다고 하더니 잘만 마시네" 하면서 나에게 집중 공세를 퍼부었다.
나는 선배들이 주는 술을 다 받아 마시고 일어나지를 못해 숙직실에서 자고 다음 날 새벽에 숙소로 갈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꿩도 기르고 있었다.
학교 특색 사업으로 몇백 마리까지 길렀었다고 했는 데 당시에는 다 정리하고 10마리 남짓한 꿩이 우리에 있었다.
꿩들은 아침마다 날개를 치면서 하늘로 날아올랐지만 망에 부딛혀 자유를 얻는 데는 실패하고 계속 우리 속에서 살았다.
장끼 한마리가 여러 마리의 까투리를 거느리고 있었다.
내가 우리에 다가 가서 몸을 구푸리고 손가락을 망에 대고 소리를 지르며 움직이면 장끼도 나를 따라서 움직였다.
암컷을 지키려는 방어 본능이었겠지만 남이 보면 꿩이 나를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가서 꿩을 부르며 움직이면 꿩이 나를 따라 다니는 것을 다른 이들은 신기해 하였다.
당시 양구에는 부화장이 없었다.
학교에서 병아리를 부화하여 농가에 분양하였다.
그런데 부화 과정에서 무정란과 발생에 실패한 알들이 나왔다. 이것을 사롱이라 하는 데 축산과 선생님들이
사롱을 골라 삶아서 술을 사다가 술파티를 하였다.
농과 학생들은 실습농장인 논에서 일을 하였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 모내기, 퇴비베기, 벼베기와 나르기, 밭에서 일을 하기 등 농사 일을 했었는 데 당시에는 농과와 축산과 학생들만 일을 하였다.
가을에 수확을 마친 후에는 시식회라는 파티를 하였다.
중학교 학생들은 선배들의 덕분에 파티에 참석할 수 있었다.
학급마다 쌀을 배급 주면 알아서 떡을 해다가 학급별로 시식회를 하였다.
나는 우리반 아이들을 잘먹이고 싶었다.
정육점을 하는 녀석에게 부탁하여 돼지뼈 등을 얻어다가 학교 인근에 있는 녀석의 집에서 배추를 넣고 국을 끓이도록 하였다.
방앗간을 하는 녀석이 있어 쌀을 보내고 부탁하였더니 시간 맞추어 뜨끈뜨끈한 떡을 보내 주었다.
아이의 아버지가 버스에 떡을 싣고 와서 전달했다.
담임의 막강한 권력(?)에 학부모들은 시키는대로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덕분에 우리반 아이들은 뜨끈뜨끈한 돼지뼈 국물에 따뜻한 떡을 먹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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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기가 막 시작된 9월 초였다.
직원 조회를 하는 데 교장이 교납금 징수 실적이 나쁘다고 교납금 독려를 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고1 보통과 납부 실적이 가장 저조하다고 1학년 보통과를 지목하여 말했다.
1학년 보통과 담임인 W선생이 일어나더니 담임이 수금원이냐고 교장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교장은 얼굴이 시뻘겋게 되어서 앉았다.
그리고 3-4일 후 W 선생은 영동지방의 어느 실업계 고교로 발령이 났다.
당시에는 교장이 문제가 있는 교사를 수시로 띄울 수 있는 권한이 있을 때였다.
W선생은 30대 후반의 노총각이었다.
6.25가 날 때 중학생이었다고 하니 우리보다 한참 위였다.
당시는 젊은 남자 교사가 많아 교직원들끼리 축구 시합을 하였다.
중고를 합하면 축구팀이 되었다.
대처승 대 비구승(기혼자 대 미혼자)의 시합이었는 데 W 선생은 비구승의 왕형님이었다.
같은 또래의 선배들은 술자리에서 W를 보고 "야 너 어디가 잘못된 것 아니냐?
그렇지 않고서는 왜 아직 장가도 못갔니?" 하면 W는 "마누라 바가지 긁지 애xx는 빽빽 울어대지 무엇이 좋다고
장가를 가니?" 하고 맞받아쳤다.
축구시합을 할 때 선배 몇이서 W를 깍지 끼며 붙들더니 "야! 이 녀석 x신이라서 장가를 못가는지 확인해 보자"라고 하며 사타구니를 만지자 W는 "야 이녀석들 보아라. 빨리 놓지 못해"라고 소리를 지른다.
양쪽에서 깍지를 끼고 사타구니를 만지던 선배는 이 새x x신은 아니구나" 하면서 깍지를 풀어준다.
지금 같으면 성추행으로 고발을 당할 일이지만 당시에는 이런 개념이 없이 장난들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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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이 되어 숙소를 이모댁에서 읍내로 옮겼다.
하숙집은 중학교 1년 선배의 집이었는 데 선배의 형수가 밥을 해 주었다.
ROTC에서 제대한 백선생이라는 고등학교 영어선생이 부임하여 왔다.
백선생은 철원고등학교를 나왔는 데 유길수선생님의 제자라고 했다.
겨울 어느 날 백선생 방 창틀에 돌이 부딛치는 소리가 났다.
백선생이 무어라 소리를 지르며 뛰어 나가는 소리가 났다.
내가 나가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어느 녀석이 돌을 던지고 도망갔다고 했다.
담임을 맡아서 애들을 심하게 다루었더니 불만을 가진 녀석이 돌은 던지고 간 것 같다고 하였다.
12월 봉급이었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처음으로 공무원들에게 보너스가 지급되었다.
'70년대 초까지 공무원들의 봉급은 박봉이었다.
초등학교 교사들은 정작 자기 자식을 교육시키지 못했다.
우리 고등학교 동기들을 보면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사인 경우 대부분이 교대를 나와 아버지의 대를 이었지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으로 진학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초임 교사의 봉급은 같은 또래의 다른 직종과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었지만 경력 10년차가 되면 공기업이나 회사원들의 봉급의 절반 수준이나 조금 상회하는 정도였다.
시골학교 교사라면 장가가기도 힘든 시대였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은 '74년부터 공무원들의 처우를 대폭 개선하여 주었다.
10월에 봉급을 30%를 인상하여 주었고 12월에는 처음으로 100% 보너스를 지급하여 주었다.
당시에는 월급을 봉투에 넣어서 줄 때였다.
보너스를 받은 선배들은 감격을 하였다.
체육을 가르치던 양규석 선생님은 나를 보면서 감격한 어조로 말했다.
"경선생은 행운아야! 나는 공무원 생활 20년만에 처음으로 보너스를 받았는 데 경선생은 들어 오는 해에 보너스를 받았으니..."
교무실 전체에 화색이 돌았다.
아마 선배들은 사상 첫보너스를 호기있게 아내에게 주었으리라. 그리고 그날은 반찬이 풍성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돈을 수학과 제2과정 연수 등록비로 모두 써서 첫보너스의 풍요함을 누리지 못하였다.
2011. 2. 7 퇴임을 며칠 앞두고 후배 교사들에게 보낸 글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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