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박정희 대통령은 장기집권을 위해 삼선개헌을 강행하였다.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와 겨루어 겨우 이겼다(95만표 정도 이겼는 데 현역군인들의 표를 거의 싹쓸이 한 것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는 패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때 혼쭐난 박대통령은 더하고 싶어도 삼선 제한에 걸리고, 헌법을 개정하여 장기집권의 길을 열어도 직선제로는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자 친위1969년 쿠테타를 일으켜 헌법을 개정하고 장기집권의 길을 열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서 이름을 따와서 친위쿠테타를 시월유신이라고 미화하였다.
경제발전과 평화통일 국론의 통일 등을 표방하였다.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국력을 조직화하며 능률을 극대화하고...."
귀가 따겁도록 들은 유신의 명분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고 중앙정보부와 행정기관을 총동원하여 유신헌법의 홍보와 투표 참여를 독려하였다.
만약에 있을지 모르는 혼란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찬반토론을 금한다고 하여 놓고
일방적인 홍보(반상회와 학교 교사를 동원한 가정방문 홍보)와 관변단체 및 각종 사회단체를 동원한 대대적인 지지성명의 발표 등을 통한 일방적인 선동선전활동 속에서 국민투표가 시행되어 95%에 가까운 투표율과 92%이상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유신헌법은 통과되어 시행에 들어갔다.
직선제를 폐지하고 통일주체 국민회의라는(중앙 정보부가 개입하여 출마자들을 선별함) 2500명의 대의원들이 대통령을 선출하게 하였다.
박대통령은 반대 한표도 없이(무효 2표) 거의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대통령의 임기는 6년이고, 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었다(통대의 형식적 승인으로)
이 유신체제는 1979년 10월 26일 박대통령이 암살당함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5.18로 무력집권한 전두환은 닮은꼴인 5공화국 헌법을 같은 방법으로 공포하고 통대 대신 5000여명의 선거인단을 구성하여 체육관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직선제를 찾을 때까지 16년간 국민들은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는
주권을 빼았겼던 것이다.
아래 표어는 필자의 집 벽면에 부착되어 있던 유신홍보 표어다.
울타리가 없어 길을 가며 벽을 볼 수가 있어 표어를 부착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블럭 담을 쌓으며 길과 벽이 차단되었다.
20년이 더 지난 1992년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 후 집을 철거하러 갔다가 표어가 붙은 흔척을 보고 촬영한 사진아다.
이 표어가 낡아지는 동안 10.26이 일어나 유신체제가 붕괴되었고
전두환이 12.12쿠테타와 5.18로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무력으로 누르고 집권하였으며
1987년 6월 항쟁으로 국민들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되찾고
직선제에 의한 대통령이 선출되는 역사가 있었다.
사람의 시선이 차단된 곳에서 유신 표어는 유신의 붕괴와 오공의 압정과 붕괴, 직선제로 주권의 회복을 말없이 지킨 것이다.
아래의 표어는 박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쿠테타인 유신을 평화통일을 위한 것으로 발톱을 감추고 있으며 투표를 독려하고 있다. 유신과 오공헌법 국민투표때 군사정권은 전 행정력과 정보기관을 동원하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통한 투표 독려를 하여 시골에서는 100%가까운 투표율과 100%에 가까운 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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