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왜정시대(예전에 어른들이 일제 강점기를 일컫던 말)를 기억하는 분들은 얼마 남지 않았다.
해방된지 70년이 넘었으니 일제강점기에 성년을 맞이하였던 분들은 90세 이상이고, 학교에 다녀 어린시절을 기억하는 분들도
80을 넘겼으니 식민지 시대를 경험한 분들로부터 그 시대의 증언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앞으로 10년 이내일 것이다.
그 시대를 체험한 분들의 경험담이 세대를 이어 전해지는 데, 이제는 전 세대의 경험이 다음 세대에 전해지는 것이 힘들게 되었다.
핵가족화로 3대 가족이 해체되다 보니 손자세대가 조부모 세대에게서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기가 힘들다.
명절이나 가족행사에 모인다고 해도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조작하거나 TV를 시청하거나 하며 어른들과 마주할 시간의 거의 없다.
필자의 세대는 앞선 세대가 겪은 생생한 체험을 들으며 자랐다.
할머니 세대는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시기를 경험하신 분들이고
부모님 세대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후 혼란기 한국 전쟁 시기를 몸으로 체험하셨으니 생생한 경험담을 들을 수 있었다.
시골에서 농한기에는 어른들이 마실을 간다고 이웃집을 방문하여 담소를 나누는 일들이 많았다.
갈 곳 없는 아이들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들은 수많은 이야기들은 거의 망각의 강을 따라 흘러 갔지만 아직 머리 속에 남아 있는 단편적인 기억이나마
되살려서 부모님 세대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1. 이모부의 증언
필자의 큰이모부는 1920년 전후에 출생하셔서 2000년에 작고한 분이다.
학교에서 정규교육을 받으신 적이 없고 강원도 양구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며 생활한 분이다.
이모부는 일제에 보국대(징용으로 강제 노역에 끌려 가는)로 징집되어 일본으로 건너 가셨다.
어느 노역장에서 일을 했는 데 급식도 형편 없었고 구타도 많이 당했다고 한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노역장에서 도주를 하였는 데 대학출신의 조선인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인도하는대로 이곳저곳을 다니며 노역에 종사하다가(아마 자유노동자가 된 듯) 해방을 맞았다.
해방을 맞이하여 돈도 한푼 못가지고(그 이유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음) 맨몸으로 귀국을 하였다.
양구에 와보니 양구는 북한의 통치하에 있었다(어른들은 해방후 - 한국전쟁 시기의 북한 치하의 시기를 인공시대라고 지칭함)
생활이 어려워 양구 광치령을 걸어 넘어서 속초에 가서 북어를 사서 등짐으로 지고 양구에 와서 파는 장사를 하셨다고 한다.
걸어서 왕복 나흘 거리이니 이모부를 비롯해서 그때의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38선을 넘어 월남을 하여 춘천에서 생활을 하다가 6.25를 만나 남쪽으로 피난을 가셨다.
피난 생활을 하다가 전선이 북상하여 사람들이 귀향을 하는 데 양구는 격전지라 돌아갈 수가 없었다.
피난지에서 만난 사람이 충남 안면도라는 섬에 가면 먹고 살 일을 찾을 수가 있다고 해서 가족들을 거느리고 안면도로 들어가셨다.
안면도에서 몇년간 온갖 고생을 하다가 양구가 수복이 되고도 한참이 지난 1957년에 귀향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때 아버지와 함께 외갓댁에 간 적이 있는 데 외할머니 혼자서 지내고 계셨다.
이모부 가족이 먼저 월남을 하고 외할머니는 혼자서 양구에 계시다가 1.4후퇴때 원주에서 피난생활을 하시고 수복이 되면서 양구로 귀향하셨기
때문에 이모부 가족보다 먼저 양구에 오셨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2학년때 이종사촌 누나가 속초 우리집에 와서 동생들을 돌보며 지내게 되었다.
아마 여러식구가 귀향하다 보니 생활이 곤궁하여 누나를 우리집으로 보낸 것 같았다.
초등학교 3학년때 양구로 이사를 갔을 때 외가댁에는 외할머니와 이모님 가족이 생활하고 계셨다.
외삼촌 두분은 해방후 - 6.25 무렵에 북쪽으로 갔기 때문에 이산가족이 되었다.
외할머니께서 북쪽으로 가서 행방불명된 외삼촌들의 이름을 부르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여러번 보았다.
이모부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역사의 격랑속에서 일제 말기의 강압기와 해방후의 혼란기 한국전쟁시기를 몸으로 겪으며 지낸 세대라고 할 수 있다.
2. 임연목 선생님의 일제말 신사참배 강압에 관한 이야기
필자가 임연목 전도사님을 만난 것은 1970년 가을이었다.
임연목 전도사님은 평양이 고향인 분으로 북한에서 생활을 하다가 6.25때 남하하여 춘천에 정착하신 분이다.
임전도사님은 중학교 음악교사를 하다가 목회에 뜻을 두고 교직을 떠나 화천군 간동면 간척리라는 시골 마을에서 전도사로 사역하신 분이다.
필자가 처음 뵙던 당시 전도사님은 50대 중반이었다.
후일 필자가 교사로 근무할 때 임전도사님과 춘천중학교에서 같이 근무한 동료 교사를 만나 임전도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동료분은 임선생님이야 말로 참된 크리스천이라고 했다.
강한 소명감 때문에 안정된 교직을 떠나 전도사의 신분으로 시골교회에서 목회를 하셨을 것이다.
임전도사님의 따님들이 필자가 다니는 교회에 출석하였기 때문에 전도사님 댁에도 자주 놀러갔고 전도사님의 경험담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큰따님은 장교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데리고 친정에서 생활하며 교회에서 반주자로 봉사하고 피아노 교습을 하고 있었다.
임전도사님이 청년시절 일제는 신사참배가 종교가 아니고 국가의식이라고 하며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고 한다.
임전도사님은 제 1계명에 "나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고 하며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일제 관헌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한 임전도사님을 감옥으로 끌고 가서 고문을 했다.
고문을 견딜 수 없어 신사참배를 하겠다고 하니 신사참배를 시키고 석방을 하였다.
밖에 나와보니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같이 끌려 갔던 교우들 대부분이 풀려나 있었다고 한다.
이 증언을 통해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위해 얼마나 심한 고문을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해방후 북한에서 교사로 근무했는 데(당시 북한에서 음악교사는 대다수가 교회에서 성가대로 봉사했던 분들이었다고 한다) 교사들 중 사상이 불온하다고 인정되면 교직에서 추방을 시켰다고 한다. 음악이나 과학, 수학 등의 교사는 추방이 미루어졌다고 한다.
6.25가 발발하고 낙동강까지 밀렸던 국군이 평양으로 진격을 하였다고 후퇴를 할 때 임선생님의 가족은 남하를 했다.
남쪽에 와서 중학교 음악교사로 10여년간 근무를 하다가 사임을 하고 목회의 길에 들어섰다고 하였다.
임목사님은 후일 장로회신학대학교에 한시적으로 설치된 특별과정을 이수하고 목사안수를 받고 경기도 가평에서 목회사역을 하셨다.
3. 원봉삼 노인의 증언.
필자는'78년-'83년에 횡성군 갑천면에 있는 갑천고등학교에 근무하였다.
이때 면사무소에 가까운 이만열씨댁에 세들어 생활을 하였다.
안집의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덕이 많은 분이었고 세 자녀들도 착했다.
안집 애들은 아들을 친동생처럼 돌보아 주었다.
5년간 같은 집에서 생활을 하며 세입자와 주인의 관계를 떠나 가족과 같은 관계가 되었다.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간 몇년후 안집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문상을 갔다.
밤샘을 하는 데 이야기꽃이 피었다.
할머니의 친척 중에 원봉삼이라는 분이 계셨는 데 당시 연세가 70대 초반쯤 되셨다.
원봉삼 어른은 전쟁이 발발되자 일본군 해군으로 징집되었다.
인도네시아에 있는 어느 섬으로 배치가 되었다.
전쟁초기 보급이 원활했던 시기 해군기지에는 수많은 보급물자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고 한다.
담배와 맥주 등 물자를 주고 원주민의 여성들과 성매매를 하는 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미군과 전투가 없었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섬에 주둔하고 있다가 해방이 되어서 귀환을 하였다.
2차대전 중반 이후에는 미군이 제해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인도네시아의 섬에 주둔한 일본군들 중에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섬에 고립되어 자급자족하며 지낸 부대들이 있었는 데 원봉삼 어르신은 아마 이런 부대에 속해 있었을 것이다.
양구에서 들은 다른 분은 일본군에 강제 입대하여 필립핀에서 전투 중 미군의 습격으로 부대가 흩어져서 동료 몇명과 함께 정글 속에서 죽을 고생을 하다가 구사일생으로 귀향하였는 데 위의 원봉삼 노인은 아주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세나라 군대 생활을 한 분 이야기
위의 어르신에 대하여 기억나는 일은 전혀 없다. 잘 알고 지내던 분은 아니고 어느곳에선가 우연히 이분에게서 살아온 이야기를 들은 것이
아주 단편적으로 기억에 남아있을 뿐이다.
위의 어른은 군무원으로 일을 하던 분이었다.
일제때 일본군에 징집되어 갔다고 한다. 어느곳에서 근무를 했었는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없다.
아마 북한지역이 고향이었던 모양으로 전후 귀향을 한 후 다시 인민군에 징집되어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후 투항을 하여 포로수용소에서 생활을 했다.
포로수용소 시절의 이야기도 했는 데 기억나는 일은 거의 없다.
반공포로와 친공포로가 죽고 죽이며 싸웠다는 이야기와 포로들 중 별별 재주를 가진 자들이 많아 여가시간에 못만드는 물건이 없었다는 정도만 기억날 뿐이다.
반공포로 석방으로 풀려난 후 국군에 입대하였다.
이렇게 해서 세나라 군대생활을 하였는 데 이분의 이야기에 의하면 대한민국 군대가 가장 군기가 약하다고 하였다.
청년기에 세나라 군대 생활을 한 이분은 시대의 고난을 한몸에 겪으신 분이다.
이렇게 우리민족의 국난의 시기에 온몸으로 시대의 아픔을 짊어지셨던 분들이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거의 타계하시고 남으신 분들도 고령으로 그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수난의 시기를 살아간 분들의 증언을 가능한 많이 수록하여 후대에 전해 주어야 할 책임이 중간세대인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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