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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셔온 글들

어느날 - 김찬구(1965년 춘천고 교지에서)

아래의 글은 필자가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65학년도 춘천고등학교 교지 소양강 15호에 실렸던 김찬구군의 작품이다.

김찬구군은 사춘기 소년의 이성에 대한 관심과 심리를 해학이 넘치는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물론 글의 내용은 허구다.

글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경호와 조연인 향기, 단역인 명각, 헌일, 요안 등의 인물들은 모두 친한 친구들의 이름이어서 더 현실감이 있게 내용이 전달되었다.

교지가 배부된 후 이글은 아주 인기가 있어 한동안 화제에 올랐었다.

그후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모교 도서관을 방문하였다가 소양강 15호를 발견하였다. 얼마나 반가왔는지!!!

글을 복사하였다. 경호에게 전화를 해보니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찬구의 소설에 대해 기억하고 있었다.

반세기전에 씌여져서 오랫동안 잠자던 글이 드디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이글을 쓴 김찬구군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고교 교사와 대학 도서관 사서직을 역임하고 지금은 서초구 도서관 관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경호는 공학박사로 대덕 연구단지에서 연구소의 책임연구원으로 근무를 했었고, 향기는 서울 사립대의 법학과 교수를 하다가 정년퇴임을 하였다.

반세기전의 고등학교 1학년생이던 우리들은 이제 거의가 일하던 직장에서 퇴직을 하고 제3의 인생기에 들어섰다. 

세월의 빠름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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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정원수의 누렇게 물든 잎이 꼭대기에만 몇 개가 남아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첫눈이 벌써 녹았다가 녹아버렸다.

그렇지만 경호는 보지 못했다. 주룩주룩 내리는 가을비와 함께 내렸었는 데 한밤중이라 경호가 꿈 속을 헤매고 있을 때였다.

“오늘은 어제보다 훨씬 더 쌀쌀하군.”

경호는 손목에 가방을 끼고 두 손은 바지 주머니에 집어 넣고서 교문을 나섰다.

혼자 외톨배기로 걸어 가지니 입을 벌릴 수가 없다. 터벅터벅 발을 옮겨 놓으며 발 앞에 놓인 돌맹이를 탁 찬다. 한참 걸어가지니 뒤에서 누가

쫒아 오며 부른다. “야 같이 가자”

경호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향기가 입에서 담배 연기처럼 뽀오얀 입김을 연방 내뿜으며 뛰어 왔다. 경호는 심심하던 차에 잘 됐다고 생각하니

꾸부렸던 허리가 약간 펴졌다. 입에서 농담이 나왔다.

“야! 허리는 왜 그리 꾸부리고 다니니? 나처럼 이렇게 허리를 쭉 펴고 다니란 말야.”하며 향기가 경호의 등을 툭치며 말했다.

“뭐 뒤에서 보니 웬 거지가 누구 가방을 들고 가는 줄 알았다. 하하하”

“이 새끼가 뭐 어째? 꼭 날 구식 기차에 있는 화통처럼 씩씩거리며 처주끼긴 잘 처주낀다.

… 그럴 수밖에 없지. 아침에 밥먹고도 학교에 와서 첫째 시간도 시작하지 않아서 도식락을 깨끗이 청소하는 청소부이니…

하긴 나도 그렇지만.“

“도시락 청소부라… 그 말 하나 잘했다. 그래 너도 도시락 청소하느라 힘 많이 들겠다. 내 매일 도와주지”

어느덧 네거리를 지나서 시청 앞에 이르렀다. 여학교 정문이 보일락말락한다. 여학생들이 한첨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때 향기가 갑자기

경호의 팔을 꼬집었다.

“이 새끼 계집애처럼 꼬집긴…”

“야 임마 저것 좀 봐, 저기 가는 저치 약간 삼삼하지?”

경호는 웃음이 나왔다. 요새는 ‘삼삼’이라는 단어를 왜 그리 많이 사용하는지 모fms다.

“조그만 녀석이 그런 건 봐서 뭘해? 난 안 볼꺼다.” “쎄끼” 경호는 고개를 돌렸다.

여학교 앞은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다. 거기까지 와서 향기는 작별 인사(?)라고 해서 농담을 건넨다.

“가다가 구렁창에느 굴러 떨어져 버려라. 하하… 잘가!”

“야 이 뭐같이 생긴 놈아. 넌 잘가지 말고 못가!” 하며 서로 헤어졌다.

 

“또 혼자 가게 되다니… 우리집 근처로 가는 길은 하나도 없누…”

경호는 슬그머니 공상이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내일은 또 어떻게 보낸담. 기하시간엔 어쩐다? 제기랄 될대로 돼. 툭하면 치거든.

쳇 S극장의 프로가 뭐더라. xx던가? 그건 재미 없겠고… M극장엔, 옳지. 그거 재미있겠군.

그거나 가자. 괜히 걸리면 골치긴 하지만. 재수만 좋으면야… 누구랑 같이 갈까? 향기? 요안? 명각? 헌일? 그깐 새끼들 관두구 계집애나

데려갈까부다. 선경이 계집애와 갈까?

같이 가줄까? 나한테 말도 걸지 않지만 싫다면 어떠할까? 싫다면 관두지. 혼자 도도한 체 해봤자 저만 손해지.“

경호네 집서부터 세 집 건너 사는 여중 이학년인 선경에게는 경호 혼자 짝사랑을 하고 있는 터이다.

“뭐 공부는 그리 잘하는 것 같지 않지만 얼굴은 예쁘장 하거든. 새빨간 복숭아빛 얼굴에 초생달 같은 눈썹에 비개인 밤하늘의 별같은 눈맹에

은어 같은 손가락에 통통한 다리통에 또 얌전하기는 한량없구. 그만하면 국제 미인대회에 갖다 놔도 부끄러울 것 하나도 없겠다. 히히…”

경호는 입 속으로 가만히 선경이를 불러 보았다. 아침에 학교에 갈 때 한번, 아다가는 때때로 만나는 선경이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학교에서 똥만이 돼지코 멧돼지 같은 자식들이 “임마 너 매일같이 그 앞으로 지나다니면서 까이 몇 개나 말들었니?”하고 물을 땐 싱겁기만

했었다.

“병신 아닌 다음에야 하나는 만들어 두었겠지. 장차 홀아비 신세를 면하려면, 하하하”

“자아식” 그리 화나는 소리는 아니었다.

<나도 선경일 내 까이로 만들어야겠다. 아니 사랑하는 애인을>

경호는 선경이가 옆에 같이 걸어가는 듯 착각을 하며 손을 허리에 쳐 올려 놓았다. 동시에 얼굴이 번쩍 들리게 되며 눈은 저 앞에 걸어나는

여학생의 등에서 멈춰 버렸다.

 

경호는 흠칫 놀랐다. 저 앞에 선경이가 책가방과 도시락 주머니를 한 손에 하나씩 들고 걸어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경호는 자기도 모르게 어깨쭉지를 쭉 펴고 걸음을 재빨리 놀리기 사작했다. 일보, 이보… 십보, 거리가 점점 줄어 들었다.

얼굴에 이슬처럼 땀방울이 맺었다. 이윽고 선경의 뒤에 몇 발자국의 간격을 두고 다가 선 경호는 술취한 사람처럼 얼굴이 붉어 있었다.

가슴에서 두근두근 방망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에서이다.

처음에 보았을 땐 왜 그리 빨라 좇아 왔나 이상할 지경이다. 아무 까닭 없이 이렇게 갂이 오고 나니 선경이가 도리어 뒤를 돌아볼까 불안하니

말이다. 이렇게 몇 분을 걸어 왔다. 이 몇 분이 경호에게는 몇 년이나 된 것 같다. 좀더 길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집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렇게 뒤만 줄줄 좇아 다니닌 꼭 수캐가 암캐 뒤를 따라 다니는 까락서니 같다. 뒤에서 누가 보았다면 틀림없이 불량배로 취급하였을 것이다. 이제 가파른 이 고개만 넘어가면 집이 눈 앞에 빤히 바라다 보일 것이다. 원래 경호가 사는 주택들은 산을 깎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길로 가자면 삥 돌아가야 된다. 그러나 가까운 길러 가자면 할 수 없이 그 절벽 비슷한 고개를 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밑에는 온갖 구정물이 흘러 내려가고 있고 변소도 한 채 서 있다.

선경이는 이미 고개를 몇 발자국 걸어 올라 갔다. 경호는 주머니에 한 손을 넣고서 아무 생각없이 그 뒤를 따라 발을 옮겨 놓았다.

고개 중턱까지 올라갔다. 그 동안 선경이는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경호가 뒤따라 오는 것도 모르는지,

아니면 알고서도 일부러 그러는지 그냥 묵묵히 올라가고 있었다.

경호는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선경이를 바라보았다. 가파른 고갯길이다. 더구나 층계가 없이 오르 내리기 때문에 대단히 불편하다. 올라갈 때는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내려올 땐 굴러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쓴다. 다 내려오면 절로 한숨이 휴! 하고 나오게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선경이는 거북보다 더 느리게 조심스럽게 걸음을 걷고 있었다. 경호는 발 밑을 내려다 보았다. 운동화 앞이 닳아서 실밥이 풀어졌고 그 속의 고무가 내다 보인다.

그때 경호는 갑자기 재채기가 나왔다. 한쪽 손은 가방을 들었고 한쪽 손은 주머니에 깊숙이 집어 넣고 있었으니 손으로 막을 사이도 없이 재채기가 튀어 나왔다.

“에엣취! 엣취!” 그와 동시에 싯누런 가래침이 햇빛에 반사되어 황금처럼 빛나며 총알처럼 튀어 나가 유도탄처럼 어김없이 선경의 노출된 다리에 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어 버렸다.

깜짝 놀란 선경은 “에그머니나!” 소리치며 그만 나가 딩굴렀다. 평지에나 딩굴었으면 그건 그래도 괜찮았겠는 데 가파른 고갯길도 어지간한 정도가 아닌 것이고 보니 여지없이 한 바퀴 재주를 넘더니 떼굴떼굴 굴러서 경호에게로 달려 들어왔다.

경호는 그만 입장이 난처해졌다. 만일 내가 막지 않으면 사랑하는 사람 - 비록 경호 혼자만 사랑하는거지만 - 선경인 저 밑으로 굴러 떨어질 것이요, 막는다면 둘이 똑같이 안고 구를 판이니.... 그래도 우선 막아놓고 보자. 할 수 없이 경호는 가방을 던져버리고 선경을 꽉 붙잡았다고 느끼는 순간, 경호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리고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기절을 해버린 것이다.

 

경호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 이틑날 아침이었다. 경호는 무언가 두런두런하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슬그머니 눈을 떴다. 아무도 없었다. 살비 굽는 것 같은 냄새가 난다. 진한 소독약 냄새이리라.

어제 점심은 아침에 다 먹어 버려서 시장하다. 목이 말라 죽겠다. 머리가 터질 듯 아프다.

경호는 일어나려고 하였다. 그러나 팔이 말을 듣지 않는다. 왜 이렇게 무거워졌을까? 경호는 엄마를 불렀다. “엄마!” 고함을 지르는 듯 크게 불렀다고 생각했는 데, 모기가 앵앵거리는 소리보다 클까 말까한 소리였다.

그 때 문이 드르륵하며 열렸다. 간호원이 얼굴에 미소를 띠고 이상스럽게 바라보는 경호에게 말을 건넸다.

“이제 정신이 나니? 어제는 어쩌다가 그런 사고를 일으켰어?”

경호는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다만 간호원이 있는 것만으로 보아 집은 아닐테고 아마 병원인게지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개가 짖는 소리가 나는가 했더니 신발을 끄는 소리가 났다.

경호는 간호원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에요? … 가축병원인가요?”

간호원은 어이가 없는 듯 소리 내어 웃는다.

“학생 정신이 좀 이상해졌다 보군”하며 문을 연다.

경호는 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간호원의 목소리가 가볍게 rnflmf 때리고 연이어 어머니의 근심스런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난 꼭 죽는 줄만 알았지.” 울음 섞인 소리였다. 간호원을 선두로 어머니가 들어오고 여학생 하나가 연달아 들어왔다. 선경이었다. 선경의 얼굴은 불안함이 역력히 떠올랐다.

어머니가 의자에 걸터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경호는 엄마를 불렀다.

“엄마” 어머니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하루 밤 새 이마에 주름이 몇 개나 더 늘은 것 같다. 경호는 엄마에게 죄송했다.

<엄마가 얼마나 걱정을 했을까? 내가 왜 선경의 뒤를 그렇게 바짝 좇아 갔을까?> 후회가 되었다. 그러나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선경이를 보았을 땐 얼굴이 뜨거웠다. 그녀가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자기에게 미안함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도리어 미안한데…>

 

지금쯤 학교에서 한창 수업이 진행되고 있겠지 생각하니 향기가 보고 싶었다.

<자식 그 자식 때문이야. 그 자식이 구렁창에 굴러 떨어지라고 그러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자아식 지금쯤 교실 한구석에서 공부하고 있겠지…>

학교에는 못 가서 불안하였다. 경호는 팔이 부러졌던 것이다. 그 외엔 그리 큰 상처를 입지 않았다. 그리고 선경인 다행히 발목만 삐었을 뿐이다. 경호가 선경이 밑에 깔렸었기 때문이다.

<어제 사고의 내용을 선경이가 다른 사람에게 얘기했으면 어떡허나> 생각하니 불안하다.

그러나 그까짓 건 아무것도 아니다. 선경이가 옆에 있으니 즐겁기만 하다.

<여자가 더 좋아>이다. 엄마가 옆에 있는 것도 좋지만 선경이가 옆에 있다는 것이 더 즐겁다. 경호는 지금 병실에 있을망정 선경이가 옆에 있으면 하나도 안 아플 것 같다. 곧 나을 것만 같았다.

<엄마와 간호원은 이제 그만 나가주었으면 좋겠는데...> 선경이와 단 둘이 있었으면 하고 바랬다. 아름다운 공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