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년 춘중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2학년 3반을 담임하였는 데 여름방학을 얼마 앞드고 정선이라는 녀석이 나에게 밉보인 일이 있었다.
녀석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좌우간 무엇인가를 잘못해서 큰 벌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정선이는 며칠간 나를 이리저리로 피해 다녔다.
학기말 성적 처리 등으로 바빠서 녀석을 혼내주려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고 넘어가기도 했다.
하루는 정선이 녀석이 청소당번이었다.
나는 담임을 할 때 청소검사를 철저히 하였다.
웬만하면 직접 교실에 가서 검사를 하였고 당번을 확인했다.
청소를 안하고 뺑손이를 치는 녀석들은 거의 없었다. 뺑손이를 치다가 적발이 되면 1주일간을 청소조장을 해야 했다.
청소조장이 되면 직접 담임에게 와서 검사를 맡아야 했고, 청소가 미진하면 책임을 지고 다시 청소를 해야 했다.
청소가 끝났으리라 생각하고 정선이 녀석을 혼내려 회초리를 들고 2층 교실로 올라갔다.
여름방학 전이라 더웠기 때문에 청소를 마친 아이들은 문을 열어놓고 둥글게 모여 앉아서 잡담을 하고 있었다.
정선이 녀석이 무엇인가 신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교실에 들어가자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이 있었는 데 조용히 하라고 손짓을 했다.
정선이 녀석은 내가 교실에 들어온 줄도 모르고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듣고 보니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엇인가 웃기는 이야기를 했는 데 애들이 크게 웃었다. 나를 본 녀석은 더 크게 웃었는 데 정선이는 자신의 말이 재미가 있어서 그런 줄 알고 더 크게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나를 호칭할 때마다 꼭 '담임선생님'이라는 존칭을 썼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의 아이들도 선생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존칭을 붙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가장 나은 경우가 '담임'이라고 하는 것이었고 이름 뒤에 욕설을 붙이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런데 정선이는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하는 데 꼭 존칭을 붙였다.
나는 갑자기 녀석이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을 혼내주려고 별렀던 생각이 눈 녹듯이 녹아버렸다.
한참 신나게 떠들다가 어떤 낌새를 느꼈는지 녀석이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는 것을 안 녀석은 귀밑까지 얼굴이 빨개졌다.
나는 녀석에게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담임 선생님'이라는 존칭을 썼기 때문에 기특해서 잘못한 것을 용서해주겠다고 했다.
그뒤 녀석은 큰 말썽이 없이 학교를 다녔고 3학년으로 진급을 했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라는 말이 있다.
정선이는 내 이야기를 하며 존칭을 사용했기 때문에 크게 혼날 것을 용서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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