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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장, 시평, 논문

설땅이 점점 좁아지는 흡연자들

얼마 전 중고교 동기인 박제호군이 동창회 카페에 올린 "홀대받는 납세자들"이라는 글을 읽었다.

담배를 태울 때마다 세금을 납부해서 애국을 하지만 어느곳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고 쫒겨 가며 담배를 피워야 하는 애연가들의 처지를 한탄한 글이다.

나는 아예 담배를 배우지 않아 애연가들의 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애연가들의 설 땅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것만은 실감할 수 있다.

 

우리가 어린 시절 어른들이 담배를 피우는 데에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없었다.

집에 손님이 오셔 아버지와 술상을 같이 하실 때면 두분이 담배를 피우셨다.

피해갈 방이 없어 옆에 앉아 있어야 했던 아이들은 꼼짝없이 담배 연기를 마셔야 했다.

아버지가 손님이 오실 때가 아니면 방안에서 담배를 거의 피우지 않으셨기 때문에 나는 담배연기를 덜 마신 셈이었다.

아버지가 지독한 애연가인 경우 담배연기를 맡아야 하는 자식들의 고충도 컸을 것이다.

버스 안에서도 끽연은 자유로왔다.

추운 겨울 창문을 닫은 버스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손님이 있으면 담배 연기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으나 감히 항의를 하지

못하였다.

버스에는 '금연'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지켜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식당이나 공공장소에서도 흡연은 제한없이 이루어졌다.

 

중학교때부터 담배를 피우는 녀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3학년쯤에는 골초들이 꽤 있었다.

우리가 고등학교를 다닐 당시 고3의 흡연율은 60%정도가 되었다는 통계를 본 것이 기억된다.

어른들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당당하게 담배를 피웠지만 이마에 피도 안마른 학생들은 담배를 피우는 데 제약이 많았다.

어른들의 눈을 피해서 담배를 피웠다.

어른들을 의식하지 않고 당당하게 담배를 피우는 요즈음 학생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고1 겨울 방학때였다.

쉬는 시간에 난로가에서 애들이 스크럼을 짜고 그 사이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경우도 있었다.

선생님이 수업에 들어오기 전에 담배연기를 없애려고 추운데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던 생각이 난다.

그때는 화장실이 끽연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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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입학해서 담배를 피우려고 몇번 시도하다가 중단했다.

연기를 마시자 재채기가 나고 견딜 수가 없었다.

담배를 피는 흉내를 내느라 뻐끔 담배를 피우다가 오히려 핀찬을 듣고 나서부터는 뻐끔 담배 조차 피우지 않게 되었다.

그후 담배를 입에 물어본 적이 전혀 없다.

아마 내가 평생동안 피운 담배는 한갑이 채 못될 것이다.

 

'74년 교사 발령을 받고 부임해 보니 교무실 책상위에는 담배 재떨이가 있었다.

수업을 마친 교사들은 쉬는 시간에 교무실에서 자유롭게 담배를 피웠다.

여러명이 모여 담배를 피우면 밖으로 피하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재떨이는 교사들끼리 다툼이 벌어졌을 때 상대방을 향해 날아가기도 했다.

당시에도 담배를 끊으려는 교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작심삼일로 그치고 말았다.

한번은 교무부장과 과학선생이 담배를 끊겠다고 약속을 하면서 담배를 피우다가 눈에 띄면 벌금을 내겠다고 했다.

2-3일은 약속이 지켜졌다. 그러나 교무부장이 "이선생에게 말하지마"라고 하면서 담배를 피웠다.

다음 시간에는 이선생이 "교무부장님께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담배를 피웠다.

며칠을 눈치를 보더니 나중에는 서로 같이 담배를 피웠다.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인지 몰라도 우리반 학생들이 담배를 피우다가 적발되면 심한 체벌을 했다.

지금 그렇게 체벌을 한다면 신문 방송에 보도가 되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한번은 우리반 녀석들 다섯명이 담배를 피우다가 어느 선생님에게 적발되어 나에게 넘어왔다.

수업이 끝나고 녀석들을 불러다가 엎드려 뻗쳐를 시켜 놓고 몽둥이로 복날 개패듯이 엉덩이와 종아리를 내려쳤다.

송연식이가 나를 만나러 왔다가 그 장면을 목격하고 나중에 나에게 실망을 많이 했다고 했다.

아무리 잘못을 했어도 어떻게 애들을 그렇게 때릴 수가 있느냐고.....

20대 중반의 젊은 혈기로 손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패놓고 "집에 가서 부모님께 상처를 보여주고 따질 것이 있으면 모시고 오라"고 했다. 녀석들은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벽을 잡고 엉거주춤 일어나서 절뚝대며 교무실을 나갔다.

항의하러 온 부모는 한명도 없었다. 아마 녀석들은 집에 가서 하소연도 못하고 끙끙 앓았을 것이다.

그후 20여년이 지난 후 양구에서 친구가 로타리클럽 회장 취임을 하게 되어 참석을 했다.

그랬더니 로타리클럽 회원 중 한녀석이 나에게 와서 인사를 한다. 이름을 이야기했는 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담임을 한 경우는 거의 100% 기억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반이었었느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에게 담배를 피우다가 적발되어 무지 심하게 맞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선생님이 그렇게 심하게 때리시고 어떻게 저를 잊으셨냐"고 항의조로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15년 정도가 지난 후 춘중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터미네이터 2'라는 별명을 가진 조정선수 출신의 수학선생이 있었다. 얼마나 힘이 센지 한번 밀면 애들이 교실 앞에서 뒤까지 밀려갈 정도였고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 선생이 주번교사로 화장실 순시를 하다가 담배를 피는 녀석을 하나 잡았다.

겁을 주고 담배를 피운 녀석들을 아는대로 불라고 했더니 몇녀석의 이름을 불었다. 이렇게 해서 담배를 피운 녀석들을 적발하다 보니 80명 정도가 적발이 되었다. 명단은 담임들에게 넘어가고 교무실은 혼나러 오는 녀석들로 발디딜 곳이 없데 되었다. 우리반 녀석들이 8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는 체벌이 많이 줄어들었고 나도 젊은 혈기를 부릴 때가 지났기 때문에 매 한대 대지 않았다. 좋은 말로 타일러 보내고 집집마다 전화를 해서 담배를 피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전화를 받은 부모 대부분이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오히려 내가 부모들에게 애들이 호기심으로 그럴 수도 있으니 너무 심하게 혼내주지는 말라고 부탁을 할 정도였다.

다음날 녀석들에게 물어보니 단순히 주의만 들은 녀석들도 있었지만 되게 혼난 녀석들도 있었다.

 

지금은 학생들의 흡연율도 줄었다고 하지만(여학생들의 경우는 증가) 워낙 담배를 피우는 녀석들의 비율이 높아졌기 때문에 담배를 피우다가 걸려도 전처럼 심하게 혼을 내준 경우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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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잠시 아이들 경우로 벗어났었는 데 다시 성인들의 흡연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80년대 중반부터 흡연에 대한 본격적인 제한이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물론 지하철의 경우는 가장 먼저 금연이 실시되었지만 초창기에는 그래도 담배를 피우는 경우가 있었던 모양이다.

지하철에서 시작된 금연은 버스 안에서도 실시되었다. 이것이 정착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대중교통에서 시작된 금연은 공공장소로 확대되었다.

'80년대 후반부터는 교무실에서 흡연이 공식적으로는 금지되었다.

'89년부터 '93년까지 4년간 춘중에서 근무하였다.

'90년에는 3학년 담임을 하느라 3층에 있는 3학년 교무실에서 있었는 데 담임 8명 전원이 남자교사였다.

쉬는 시간이 되면 수업을 마친 흡연 교사들이 3학년 교무실에 모여서 담배를 피웠다.

좁은 교무실은 금방 곰굴이 되었다. 담배연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나는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1년을 그렇게 고생을 했다.

당시 교감선생님도 흡연자였는 데 하루는 조회시간에 교무실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행정적으로 지시를 했다.

교감이 밖으로 나가고 나서 '50대 초반의 국어교사인 A선배가 얼굴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담배도 마음놓고 못 피우느냐고?  어느 년이 교감에게 항의했냐고..."

그러나 누구도 동조하는 사람이 없었다.

흡연자의 절규는 이렇게 역사 속으로 묻히고 말았다.

그뒤 교무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교사는 더 이상 없었다.

 

흡연자들의 흡연공간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처음에는 대중교통 기관 안에서, 다음에는 근무공간에서, 다음에는 공공 건물 내부에서, 이제는 보행하면서 피우는 것까지 제한을 받게 되었다.

'50년대에 국가 수입의 10%정도가 전매수입(담배, 인삼, 소금 등)이었다.

지방자치가 처음 실시될 때 강원도의 기초단체 세입의 60-70%가 담배소비세였다.

이렇게 국가와 지방재정에 막대한 기여를 했던 담배가 이제는 건강보험료를 잡아먹는 하마로 인식되게 되었다.

보건 비용의 지출을 줄이려고 금연운동을 펼치고 있다.

박제호의 말대로 흡연자들은 세금을 내면서도 이 눈치 저 눈치를 보면서 이곳저곳을 피해 가며 담배를 피우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성역인 PC방, 당구장에서 조차 담배는 쫒겨 나게 생겼다.

더 이상 지정된 장소가 아닌 건물 안에서 담배를 피울 곳은 없게 된 것이다.

집안에서도 아주 간이 큰 경우가 아니면 애들이나 마누라 눈치가 무서워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고 아파트 밖에서 담배를 피워야 하는 초라한 가장이 되고 말았다.

 

흡연자들은 마음대로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하게 담배를 피울 수 있었던 그 옛날이 그리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