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은 아이들에게 즐거운 날이다.
특히 옛날에는 더 그랬을 것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도 설은 즐거운 날로 기억이 된다.
모처럼 먹거리가 풍성한 날이 설날이다.
하루 세끼를 먹기도 바빴던 시절 비린 것은 거의 먹지를 못했다.
그런데 설날에는 특별한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떡이며 잡채며 네등분한 삶은 계란이며 생선찜 등 평소 먹지 못하던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사탕이나 과자 등이 특별 배급되었다.
우리가 반공교육을 받을 때 북한에서는 일년에 돼지고기 세번을 배급받는다고 했는 데
그 시절 농촌의 보통 가정에서는 일년에 네다섯번 정도 돼지고기를 맛볼 수 있었다.
그날은 설날과 추석과 마을에서 고사를 지내는 날, 할머니 생신날 정도였다.
또, 매번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새옷을 입을 수 있는 날도 설날이었다.
설날 차례를 지내고 동리 어른들에게 세배를 갔다.
당시는 가난하던 시절이라 세배돈을 받은 기억은 별로 없다.
대신 떡이나 사탕 등을 대접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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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리 청년들은 곱게 한복을 입고 노인들이 계신 집으로 세배를 다녔다.
우리집에도 할머니가 계셔서 동리 청년들이 세배를 왔다.
어머니는 상을 차려 청년들을 대접하였다.
우리집은 마을 본토백이도 아니고 흘러 들어와서 사는 집인데도
할머니가 계신 관계로 청년들이 세배를 오곤 했다.
작은 마을이지만 마을은 활기가 넘쳤다.
좁은 골목 길에는 아이들의 노는 소리로 왁자지껄했고...
설이 지난 정초에는 농악대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앞마당에서 장구치고 북치며 한바탕 놀면서 일년의 평안을 기원했다.
농악대가 방문한 집에서는 쌀이나 돈으로 답례를 했다.
농악대가 연습을 할 때나 패를 이루어 가가호호 방문을 하는 것은 좋은 구경거리었다.
아이들은 농악대 뒤를 따라다녔다.
물론 나도 그 아이들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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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 지나고 나면 마을 사람들은 다시 일상의 생활로 돌아갔다.
마을에서 제법 잘사는 집의 큰 사랑방에서는 동리 어른이나 청년들이 모여 가마니를 짜거나
새끼를 꼬았다.
나를 비롯한 아이들은 어른들이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짜는 모습을 구경하였다.
농사를 짓는 애들은 어른들을 도와주기도 하였지만 우리집은 농가가가 아니어서 나는 구경만 하였다.
가마니 짜는 틀을 갖다 놓고 새끼를 틀에 세로로 걸어 씨줄을 삼고
짚을 긴 막대에 끼워 넣었다 빼었다 하며 가마니를 짜는 모습은 재미가 있었다.
새끼는 손으로 꼬기도 하고, 새끼를 꼬는 기계로 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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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에서는 화투놀이가 성행하였다.
나이롱뻥이나 장땅 섯다 등이 유행했는 데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내기 화투를 쳤다.
어느 청년이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장땡이다. 장땡이다" 라고 잠꼬대를 하였다고 한동안 마을에서 화제거리가 된 일도 있었다.
밤늦게 화투를 쳤는 데 늦은 밤 속이 출출하면 막국수를 시켜 먹었다.
마을에는 겨울철에만 한시적으로 국수를 삶아 파는 집이 생겼다.
부엌에 설치된 막국수 틀에 반죽을 넣고 누르면 국수 가닥이 밀려 나오고
이것을 큰 대접에 말아 넣은 것을 김치와 양념 간장과 함께 차려 들어 가면 꾼들이 먹었다.
막국수를 누르는 것을 본 기억은 있지만 먹어 본 기억은 없다.
이것이 뒷날 막국수가 되어 춘천이나 인근 지방의 대표적인 음식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막국수를 먹을 때마다 어려서 눈으로 보기만 하고 먹어본 기억은 없는 막국수 생각이 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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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름이 가까와지면 아이들은 들뜬다.
깡통에 구멍을 뚫고 화약을 준비하는 등 보름맞이 준비를 한다.
열나흘 날엔가 홰쌈이라는 놀이를 한다.
깡통에 마른나무 가지를 넣고 불을 붙여 '달맞이 훨훨...'하고 외치며 빙빙 돌리는 데
멀리서 다른 마을의 아이들이 돌리는 것을 보면 장관이었다.
고인돌 마을의 아이들은 아랫 마을인 후곡리 아이들과 홰쌈을 하였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또래의 남자 아이들이 모여 불이 타는 깡통을 한손으로 휘두르며
한 손에는 몽둥이를 들고 후곡리 마을 쪽으로 소리를 지르며 가면
그쪽 마을 아이들도 맞받아 소리를 지르며 우리 마을 쪽으로 몰려 왔다.
어디서 구했는지 군인들이 쓰던 화약을 구해 식딱꿍(쉿 소리를 내며 올라간다고 해서 붙인 이름, 폭죽)을
만들어 발사를 하면 쉿쉿 소리를 내며 불꽃이 올라갔다.
나무를 깎아 만들고 양초를 장전해 발사하는 화약총을 공중으로 쏘는 형들도 있었다.
두 마을의 중간 지점에서 마주치는 데 서로 소리를 지르며 짚단에 불을 붙여 휘두르기도 하고
불붙은 깡통을 휘드르며 소리를 지르고 서로 욕을 하고 협박을 하면서 가까이 가기도 하였지만
몸을 부딛히는 싸움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멀리 뒷편에는 고등학교에 다닐 나이의 형들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동생들의 놀이를 지켜 보았다.
정초에는 아이들이 제기차기도 하고, 자치기도 하고 연날리기도 하고 물을 얼린 논에서 스케이트도 타면서 놀았지만
이런 놀이 활동에 소극적이던 나는 지켜 보기만 하였을 뿐 직접 참여한 일은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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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들은 마실을 다녔다.
사전 약속도 예고도 없었다. 아무때나(주로 저녁 식사 후) 찾아와서 주인을 부르면 문을 열어 주고
안으로 들이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다.
우리집에는 이웃 아주머니들이 자주 놀러 왔다.
와서 이야기하는 이야기 거리는 정해져 있었다.
왜정시대 이야기, 인공시대 이야기, 6.25때 피난 이야기였다.
방 두칸에 온 식구들이 살던 때라 어머니와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이 주고 받는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아저씨들이 놀러 오면 이야기 주제는 왜정시대 이야기, 보국대로 일제에 징용으로 끌려 갔다 왔거나 일본군으로
남양군도에 다녀 온 이야기, 6.25 참전 이야기나 피난 이야기였다.
때로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도 있었다.
덕분에 내가 직접 겪지 않았거나 겪었어도 너무 어려서 겪어 알 수 없었던 왜정시대나 인공시대 6.25 피난 이야기들을
재구성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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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이라 동생 가족들과 아들의 가족들이 왔었다.
세배를 받는 시기가 되었다.
세배돈을 받을 것에 대한 설레임이 아닌 세배돈을 어떻게 나누어 줄 것인지를 계산하게 되었다.
설 전날 조카들과 손녀들과 종손자들에게 줄 세배돈을 계산하여 봉투에 넣으며
세월은 물과 같이 빠르게 흘러 지나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우리의 손자 손녀들은 어린 시절의 설을 어떤 모습으로 기억하게 될까?
2010. 2. 15 춘천고교 40회 동창회 카페에 올렸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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