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나이를 먹어 가서인지 최근의 일들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빈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일들은 바로 얼마 전에 일어난 것처럼 아주 생생하게 떠오른다.
30호 가량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양구군 동면 지석리 고인돌 마을은 지금도 내 마음 속에 존재하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의 집집마다 사연이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말씀해 주셨던 것과 내가 보고 들은 것들이 뒤섞여서 적은 조각들이지만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고인돌 마을에는 이발소가 없었다.
30호 정도가 사는 마을에 이발소가 있었다면 십중 팔구 파리를 날려야 했을 것이다.
이발소는 없었지만 김씨 성을 가진 60세 가량의 할아버지가 마을 사람들 머리를 깎아 주었다.
아무때나 찾아 가서 이발을 해달라고 하면 할아버지는 집 앞 마당에 낡은 나무 의자를 가져다가 그 위에 앉게 하고
목에 흰 천을 두르게 하고 머리를 깎아 주었다.
당시 초등학교 남자 애들의 머리는 주로 박박머리였다.
우리 반의 남자 애들이 20명이 조금 못되었는 데 거의 대부분이 삭발을 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머리를 깎으면 머리가 잘려져 나가는 것이 아니고 뽑혀져 가는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
머리가 집히니 몹씨 아팠다.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면 할아버지는 욕을 해가며 머리를 깎았다.
이발하는 시간은 아주 고통의 시간이었다.
아마 바리깡이 낡아서 머리카락을 집어당겼기 때문일 것이다.
초등학교 학생이니 물론 면도는 안했고, 머리를 감는 일도 없었으니 머리만 삭발하면 이발 절차는 모두 끝났다.
이발 요금은 가을에 집집마다 이발하는 식구 수에 따라 쌀로 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따라서 이발을 하러 갈 때 돈을 가지고 갈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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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사 할아버지는 양구가 분단되며 북한에 속하게 된 문등리가 고향이라고 했다.
원래 장성한 아들도 있었는 데 전쟁 중에 이산가족이 되고 재혼을 하여 새가정을 이루었다고 한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때 그 할아버지는 60세쯤 되었고, 부인과 세 딸이 있었다.
부인은 어려서 남의 집 민며느리로 들어 갔었다고 하는 데 6.25때 가족과 이별하고 할아버지를 만났다고 한다.
딸들의 나이는 각각 10-11세, 7-8세, 4-5세 쯤 되었다.
큰 딸은 내가 6학년때 1학년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막내딸만 정상에 가깝고 위의 두 딸들은 정신 지체아였다.
큰 딸이 나이가 많이 먹어서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도 발달이 늦었기 때문이다.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의 늦봄쯤이었다.
이발사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마 그 할아버지는 헤어진 옛 가족과 남겨질 정상이 아닌 어린 딸들을 생각하며 제대로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이 메는 상여를 타고 정든 집과 마을을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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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해 우리 집은 20리쯤 떨어진 남면 창리라는 마을로 이사를 갔다.
자연히 이발사 할아버지도, 그 딸들도 잊어버리게 되었다.
아마 고1 겨울 방학때 쯤일 것이다.
나는 예전에 살던 고인돌 마을을 방문하였다.
그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동기인 방상옥이를 만나러 갔었다.
상옥이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집에서 형을 도와 농사를 짓고 있었다.
하룻밤을 묵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발사 할아버지의 유족들은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정신지체였던 큰딸은 5학년때인가 학교를 그만두고 열다섯살인가의 나이에 시집을 갔다고 한다.
물론 정상적인 결혼이 아니고 아들이 없는 어느 나이 많은 남자가 자식을 보기 위해 데리고 갔다고 한다.
큰딸은 부엌에서 일을 하다가 실수로 불이 났는 데 옷에 불이 붙어 화상을 입고 사망을 했다고 했다.
상옥이의 이야기로는 정상적인 지능을 가졌다면 제대로 대응을 하였을 터인데 정신지체다 보니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해
큰 사고로 이어진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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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이 발발했고, 많은 가정이 가족을 잃거나 이산되는 슬픔을 겪었다.
위의 이발사 할아버지의 가정도 이런 이산의 아픔을 겪은 시대의 희생자의 하나였다.
전쟁후 어려운 시대 사회의 복지도 확립되어 있지 못하고 안전망도 없었던 시절이라 신체나 정신의 결함으로 인한 불행은 혼자서 떠 안아야 할 짐이었다.
할아버지의 부인이었던 분 역시 어려서 비정상적인 결혼을 했고, 전쟁으로 가족을 잃었고, 비슷한 처지의 남자를 만나
새 가정을 이루었으나 낳은 아이는 정신 지체였고 그나마 연로한 남편은 가족들을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
정신지체의 딸들을 부양하기에는 힘이 부쳤고, 입 하나라도 덜을 요량으로 자식을 바라는 어느 나이 많은 남자에게 딸을
보내야 했는 데, 그곳에서 사고를 당해 어린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갔으니 그 심정이 어땠을까?
이발사 할아버지 보다 그 부인이 어쩌면 더 시대의 아픔을 겪은 분이리라.
이발사 할아버지의 부인은 아마 고달팠던 인생의 짐을 내려 놓고 저 세상으로 떠났겠지만 남은 두 딸들은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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