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어려웠던 시절 도움을 주었던 이웃, 잊을 수 없는 친구나 스승을 찾는 프로그램으로 잔잔한 감동을 주는 프로그램이다. 필자가 보고 싶은 배씨 아저씨 부부는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만날 수 없는 분들이다. 지금 내 기억 속에는 아저씨의 성이 배씨였다는 것만 생각이 날 뿐 아주머니는 성도,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나 배씨 아저씨네나 모두 객지에서 잠시 살면서 만났기 때문에 배씨 아저씨에 대한 아무런 정보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분이다.
필자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시절 강원도 양구군 동면에서는 큰 토목공사가 벌어졌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큰 공사도 아니지만 당시로써는 큰 공사였다. 우리 집에서 6km쯤 떨어진 민통선 바로 밑인 월운리에 저수지를 만들고, 저수지로부터 10km 정도 떨어진 가오작리까지 농업용 수로를 만드는 공사였다. 1961년인 당시에는 중장비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작업을 인력으로 하였다.
우리 집은 농업용 수로가 통과하는 중간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 동리에서도 공사판이 벌어졌다.
수많은 인부들이 동원되어 삽과 곡괭이로 땅을 파고 수로를 내었다. 암반이 나오는 곳은 폭약으로 폭파를 하였는 데 이것은 큰 구경거리였다. 폭파 작업을 할 때는 미리 통보가 되었고, 사람들의 왕래를 통제하고 폭파를 하였는 데 어린 우리는 귀를 막고 긴장된 상태에서 폭파장면을 지켜 보았다. 엄청난 폭발음이 나면서 돌조각, 흙먼지 등이 솟구치는 것은 장관이었다.
어른들 키로 한길이 넘는 깊이로 도랑을 파서 만드는 수로는 일일이 삽으로 흙을 파고, 세사림이 한조가 되어 가래질을 하여 흙을 밖으로 퍼내는 작업이었다. 일한 품삯의 일부는 통밀로 지급이 되었다. 푸대 겉에는 '미국 국민이 보내준 밀'이라고 씌여져 있고 한국 사람과 미국 사람을 상징하는 두개의 손이 악수를 하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우리 마을에는 공사판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방을 얻어 거주하였다. 배씨 아저씨는 공사판에 일하러 온 인부들 중 한분이었다. 그런데 수로 공사가 끝나고 나서도 배씨 아저씨 부부는 떠나지를 않고 우리 마을에 머물러 살았다.
배씨 아저씨는 당시 30세가량 된 분이었는 데 불행히도 두 분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아저씨는 원시 인류인 크로마뇽인처럼 생긴 얼굴이었고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분이었다.
배씨 아저씨 부부는 농번기에는 마을 사람들의 농사 일을 하기도 하고, 농한기에는 나무를 해다가 팔기도 하면서 생활을 하였다.
그러면서 객지인 마을에서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 큰 일이 생기면 두 내외가 팔을 걷고 나서서 마을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하였다. 마을 어른들이나 부모님이 배씨 아저씨 내외를 칭찬하는 말을 여러번 들었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기 전인 1963년 1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당시의 할머니들로써는 드물게 한글을 읽으실 수 있었던 할머니는 손자인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여 주셨다.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는 여러번씩 들어서 지금도 기억이 나는 부분이 많다.
그외에도 강감찬 장군, 태조 이성계, 사명대사 등에 관한 이야기를 하여 주셨다. 할머니는 육전소설이라는 표지에 울긋불긋한 그림이 그려져 있고 큰 글자로 인쇄된 얄팍한 소책을 즐겨 읽으시고 이야기를 하여 주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1963년 1월의 겨울은 무척 추웠다. 양구는 철원과 더불어 남한에서는 가장 추운 곳의 하나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날씨에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일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배씨 아저씨 내외는 이런 추위 속에서 우리 집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할머니의 장례일을 거들었다. 날씨가 너무 추워 꽁꽁 얼어붙은 개울 위로 상여가 건너갈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다행이기도 하였지만 땅이 두껍고 단단하게 얼어 불을 피워놓고 땅을 녹이면서 땅을 팠다고 하니 산역을 하는 분들은 엄청 고생을 하였을 것이다. 산역을 마치고 제사를 지낼 때 젯상에 떠놓은 메(밥)가 얼었을 정도로 혹한이었다. 할머니의 장례는 추운 날씨였지만 마을 사람들 모두가 나서서 도와 주어서 잘 모실 수 있었다.
어머니는 배씨 아저씨 내외를 비롯한 그때 마을 분들의 도움을 두고두고 고마와 하셨다.
그해 봄에 우리 집은 살던 지석리에서 양구읍 쪽으로 10km쯤 떨어진 마산이라는 동리로 이사를 가면서 배씨 아저씨 부부와 헤어지게 되었다. 그해 여름 배씨 아저씨가 먼저 살던 곳에 집을 지으려고 준비하여 두었던 목재를 운반하여 왔을 때 마지막으로 만났다. 1965년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면서 춘천으로 이사를 온 후 배씨 아저씨 내외는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고1 때인 '65년 여름방학때 먼저 살던 지석리에 친구를 만나러 갔을 때 배씨 아저씨 내외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고 하였다.
40년이 흘렀다. 10년전에 소천하신 어머니께서는 가끔 배씨 아저씨 부부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필자의 기억에도 동리의 궂은 일은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서 앞장 서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리고 할머니의 장례식때 우리 일을 자신의 일처럼 돕던 모습이 기억난다. 전혀 연고가 없던 객지에 공사판을 따라 흘러 들어왔다가 인심이 좋은 동리에 머물러서 마을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살면서 마을 분들의 칭송을 받던 배씨 아저씨 부부. 아저씨의 선한 얼굴 모습과 억센 경상도 억양의 사투리가 그립다.
워낙 부지런하였던 두 분이었으니까 가난은 극복하였을 것이다. 늦게 나마 슬하에 자녀를 두었기를 희망한다. 두분은 어느 곳에선가 이웃 사람들을 도우면서 인심 좋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로 살고 계실 것이다.
|
2004. 6.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