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우파가 박노해에게 배워야 하는 것
배진영 (월간조선 차장)
박노해 시인이 또 사진전을 열었다. 서울 부암동 ‘라 카페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사진전의 제목은 ‘구름이 머무는 마을’. 이번에 박노해 시인이 찾아간 곳은 파키스탄이다.
전시 안내 e메일에 첨부된 사진을 보니 파키스탄에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웅혼한 대자연, 양떼를 모는 건장한 사내, 천진난만한 어린이들, 한 줄기 햇살이 들어오는 암굴 같은 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
전시 안내장에 “총성과 폭음이 끊이지 않는 고통의 땅, 예전에는 천국이라 불렸으나 지금은 지옥이 된 땅” “고통과 결핍 속에서도 서로 의지하고 노동하고 기도하며, ‘이만하면 넉넉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라고 적힌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박노해는 1980년대를 풍미했던 노동시인이었다. 대학시절 게시판에는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는 거친 함성을 담은 대자보와 함께 박노해의 시(詩)가 붙어 있었다. 그때 그의 시에 공감한 적은 없었다. 좌파 평론가들이나 운동가들은 그의 시를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지만 내가 보기에 시라고 하기에는 그의 언어, 그의 표현이 너무 거칠었다. 말이 시였지, 그건 선전선동 구호였다.
그의 이름으로 나온 ‘노동의 새벽’이라는 시집이 인구에 회자(膾炙)됐지만, 박노해의 실체를 두고 말이 많았다. 하나의 창작집단이 ‘박노해’라는 이름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얼굴 없는 시인’이라고 불렸다.
■박노해의 변신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이 세상에 얼굴을 내민 것은 1991년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 때였다. 그는 주사파(主思派)는 아니었다. 하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 원리에 따라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한 혁명조직의 수괴였다. 그는 사형을 선고 받고 수감돼 7년 5개월을 복역했다.
박노해는 감옥에서 나오기 한 해 전인 1997년 옥중 에세이집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냈다. 몸은 감옥에 있지만, 그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훨씬 순화됐다. 핏대를 올리면서 혁명을 외치기보다는 한껏 정제된 목소리로 자신에 대한 성찰과 세상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세상은 그가 달라졌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글, 그의 시에서 변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과 자본이 중심이 되는 세상에 대한 비판의식이 그것이었다.
1998년 감옥에서 나온 후 박노해를 대형서점에서 주최하는 ‘저자와의 대화’ 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런 자리에서 만난 그의 모습은 ‘댄디하다’는 표현에 딱 들어맞는 멋쟁이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변화에 적응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물론 소외계층에 대한 애정과 자본이 중심이 되는 신(新)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의 끈도 놓지 않았다.
10여 년 동안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난 2010년 1월, 그는 시인이 아닌 사진가로서 다시 나타났다. 그 동안 세계의 후미진 곳들을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었다는 그는 그 가운데 중동(中東)에서 찍은 사진들을 가지고 ‘라 광야’라는 사진전을 열었다.
박노해는 전시회에 부치는 글에서 ‘석유자원을 노리는 미국의 침공과 그에 결탁한 친미(親美) 독재정권’으로 인한 아랍 민중의 고통에 대해 말하면서 “중동-이슬람 지역은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미국의 패권과 독주를 견제하며 인류 약자의 정의를 지켜온 중요한 축이자 희생자’”라고 치켜세웠다.
결국 박노해는 자신의 뜻을 전하는데 필요한 소재가 국내 노동자에서 중동 민중으로, 포장 방법이 노동시에서 사진으로 바뀌었을 뿐,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과 ‘자본’과 ‘제국’에 대한 저항의식은 변하지 않았던 셈이다.
그 후 박노해는 거의 매년 사진전을 열었다. 이번 사진전 역시 소재만 파키스탄으로 바뀌었을 뿐, 그가 사진을 통해 무엇을 얘기하려는지 안내장을 일별하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박노해는 ‘나눔문화’라는 단체를 이끌면서 대중을 상대로 교양강좌나 문화행사도 곧잘 열었다. ‘나눔문화’에서 여는 강좌나 행사의 주제들은 ‘생명‧평화‧나눔’이었다. 그리고 그런 주제 아래 신자유주의와 미국의 패권주의, 자본의 탐욕을 비판해 왔다.
이후 박노해는 몇 권의 시집을 더 냈다. 이제 그의 시들은 아주 말랑말랑해졌지만, 그 안에서 어떤 변치 않는 고갱이가 느껴졌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광우병‧해외파병‧4대강 반대 등 현안이 있을 때마다, 거기에 참여한 좌파단체들의 이름 속에서 ‘나눔문화’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변화하는 보수’가 필요하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박노해와는 이념적으로 대척점(對蹠點)에 서 있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은 견지하면서도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면서 매번 달라진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타나는 그의 변신 노력에 대해서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박노해뿐만이 아니다. 좌파 지식인·문화예술인·운동가들은 시기와 상황에 따라 현란하게, 슬기롭게 변신하면서 대중의 마음을 파고든다.
반면에 ‘보수진영’은 그런 면에서 너무 ‘보수적’이다. ‘젊은 피’는 수혈(輸血)되지 않는데,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사는’ 이들은 너무 많다. 운동의 방식이나 포장방법에서도 구태의연하다. 보수우파가 대중, 특히 젊은 층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보수(保守)’는 과거에 대한 무조건적 집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보수’라는 것은 ‘지켜야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전통과 체제, 원칙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 핵심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필요할 때, 구체적 정책이나 대중과의 소통방식 등에서 과감하게 변화할 줄도 알아야 한다.
영국의 보수당이 300년이라는 세월을 넘어 오늘날까지 생존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대한민국 보수우파는 박노해에게서 배워야 한다.
[출처] [제89호] 보수우파가 박노해에게 배워야 하는 것 - 배진영|작성자 PR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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