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양구중학교 2,3학년때인 1963-1964년에 양구군 남면 창리 마산마을에서 살았다.
양구읍에서 동면을 오가는 버스가 하루에 몇번 있어 버스통학이 가능했지만 우리마을 친구들은 모두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5km가 넘는 거리지만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이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걸어서 학교를 오갔다.
주로 친구들과 같이 도보로 통학을 했지만 가끔 혼자서 등하교를 할 때도 있었다.
'70년대 초 한때 가수로 활동하였던 혼혈가수 김복천(샌디김)은 구암리 마을에서 도로건너편 부대 인근 외딴 곳에서 살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이 가난하게 살 때지만 샌디김의 집안은 무척 어려웠다.
필자의 기억에 샌디김의 어머니는 부대 앞에서 군인들 군복을 세탁하고 수선해 주는 일을 했던 것 같다.
샌디김의 아버지는 고물수집을 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샌디김은 양구초등학교에 다녔는 데 초등학교 축구대회를 할 때 운동장에서 뛰는 샌디김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샌디김은 양구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애중학교(고등공민하교)에 진학을 하였다.
피부색이 다르기 때문에 금방 눈에 띄었다.
그후 필자가 마산마을에 이사를 와서 살게 되며 샌디김과 같은 방향으로 통학을 하였기 때문에 가끔 길에서 만나 동행을 했던 적이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며 같이 걸었는 데(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샌디김에게 편견이 없이 친절하게 대하려 노력했었다.
내가 두학년인가 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후 샌디김을 강원대 재학시절에 한번, 양구에서 교사로 근무할 때 두번인가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다.
샌디김은 나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나를 볼 때마다 "형님"이라고 외치며 반갑게 뛰어 왔다.
TV에 출연한 것을 몇번 보고, 프로권투를 한다는 소식을 들은 적도 있지만 그후 미국에 건너가서 산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 만난 적이 없다.
'93년부터 양구 모교에 두번째로 근무할 때 샌디김과 동기인 후배의 아들이 몇년전인가 양구에 와서 동창들을 만나고 갔다는 소식을 들은 후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3년전 샌디김의 생각이 나서 기사를 검색하여 보았더니 미국에서 경비용역회사를 운영하며 지내고 있고
LA의 흑인 소요사건때는 무장동료들을 데리고 와서 한인 상가를 보호하였다는 기사를 끝으로 그의 소식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며칠전 김복천씨(샌디김)에 대한 강원도민일보의 기사를 접하였다.
그의 소식을 듣고 너무 반가왔다.
그런데 그의 실제 나이가 나보다 더 많았다.
내가 학교를 일찍 들어가 학년이 높았기 때문에 나보다 연장자에게 형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김복천(샌디김)을 기회가 있으면 한번 만나고 싶다.
사진에서 본 그도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어 나이가 든 모습이었다.
아래는 김복천씨에게 쓰는 편지와 예전에 작성하여 블로그에 올렸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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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
도민일보를 통해 소식을 듣고 보니 너무 반가왔습니다.
김복천씨가 나를 형이라고 했는 데 나중에 알고 보니 복천씨가 나보다 나이가 많더군요.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소식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떻게 지내는지는 몇년전 인터넷에서 샌디김을
검색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 강원도민회 행사에 참석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도 있습니다.
또, LA 소요사태때는 무장한 동료들을 데리고 와서 한인타운을 지켜 주었다는 기사도 접하고 감격을 했습니다.
그뒤 몇년간 소식을 몰라 궁금했는 데 며칠 전 강원도민일보 기사에서 김형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반가왔습니다.
여전히 양구에 대한 강한 향수와 애향심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읽었습니다.
양구군 군의원을 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읽고 깊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나도 양구에 대한 강한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페이스북에 출신지역을 양구라고 표시하였지요.
40여년전 양구에서 근무할 때 담임을 했던 제자가 양구군의회 의장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세월이 많이 흘렀군요.
김형이 귀국하면 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혹 내 블로그를 방문하여 이 글을 읽는다면 꼭 연락바랍니다.
늘 건강하고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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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디김에 대한 추억(2013에 쓴 글)
'70년대 초 가수로 반짝 이름을 날렸던 샌디 김은 양구 출신이다.
그후 프로 권투에 데뷔했다는 소식(불확실한 기억임)도 있었는 데 명성은 오래가지 않고 곧 잊혀진 인물이다.
초등학교 축구 대회를 할 때 운동장에서 뛰는 샌디김의 모습을 본 것이 내가 샌디김을 본 최초의 기억이다.
당시만 해도 다문화에 대한 개념이 없을 때 혼혈인 그가 겪었을 아픔은 컸을 것이다.
백인도 아니고 차별을 받고 있는 흑인 혼혈인 그는 더 큰 멍에를 메었을 것이다.
'63년 중2가 되면서 우리집은 지석리 고인돌 마을에서 창리 마산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전에는 버스를 타고 통학을 했지만 마산에 온 후부터는 걸어다니게 되었다.
그때는 송우리나 용하리에 사는 학생들도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학교에 갈 때는 구암리와 황강리의 경계를 이루는 제방길을 지나게 된다.
가끔 등교를 할 때나 하교를 할 때 샌디김과 동행을 할 때가 있었다.
다문화에 대한 개념이 부족했던 당시 혼혈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이 조금은 있었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샌디김을 보통의 친구 대하듯 대하여 주었다.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샌디김이 나보다 학교로는 1-2년 아래였다.
그는 양구 초등학교를 나와 성애 중학교를 다녔다.
그의 어머니는 구암리 마을에서 떨어진 도로와 개울 사이에 있는 집에서 군인들 빨래를 해주거나 옷을 수선해 주는 일을 했던 것 같고 그의 양부는 고물수집을 하며 생활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이름은 복천이었고 성은 이씨로 기억되는 데 동기인 김정현 군은 그가 김씨라고 하니 내 기억이 정확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샌디김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아마 김씨가 맞을 것으로 생각된다.
'65년 고등학교 진학관계로 양구를 떠난 후 샌디김을 만나거나 연락을 한 적은 없었다.
강원대에 다니던 '71년의 일로 기억된다.
이때는 샌디김이 가수로 데뷔하여 한창 이름을 날릴 때였다.
정확한 가사와 곡은 기억나지 않지만 "고향이 어디냐고 묻지를 말아라. 서럽게 태어난 이몸.." 아마 이렇게 노래가 시작되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이글을 읽은 독자분께서 그가 부른 노래를 올려준다면 하는 바램이 크다.
샌디김이 부른 노래가 히트를 치고 그의 이름이 알려졌을 때 그가 양구의 샌디김인 줄 알고 무척 반가웠었다.
'71년 가을 교내 체육대회를 할 때였다.
경사진 둑에 앉아 경기를 관람하고 있는 데 누가 '형님'하고 부르면서 나에게 뛰어 오는 것이었다.
일어나 보니 샌디김이였다.
너무 반가와 아래로 뛰어 내려가 샌디김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강원대에 왔다고 했다.
얼마나 고생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좋은 부모님을 만나 오히려 행복하게 성장했다고 대답했다.
그후 그가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부모님을 잘만나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냈다고 답하였는 데 양부와 어머니가 가난했지만 샌디김을 사랑으로 잘 길렀을 것이다.
몇년 후 모교인 양구중학교에서 근무할 때다.
교회에서 야외예배를 가려고 시내 어느 곳을 걷고 있는 데 샌디김이 나를 불렀다.
샌디김이 양구에 온 것이다. 몇년 만에 반갑게 만났지만 서로의 일정이 있어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다.
그후 지금까지 샌디김을 만나지 못하였다.
샌디김이 미국으로 건너 가서 살고 있으며 어머니에게 미국 구경을 시켜 들었다는 기사를 어디에선가 읽은 기억이 있을 뿐이다.
상당한 세월이 흐른 후였다.
어느 드라마엔가 샌디김이 출연한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아마 야구선수로 나왔다고 했는 데 그 프로를 보는 아이들에게 아빠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는 사이라고 말해주었던 기억이 안다.
'93년 양구중학교에 두번째 근무할 때였다.
수업 시간에 샌디김 이야기를 했더니 한 녀석이 샌디김이 아빠의 친구라고 했다.
미국에 살고 있는 데 초등학교 동창들과 연락을 하고 있고, 양구에 다녀간 적도 있다고 했다.
몇년전 샌디김의 소식이 궁금하여 인터넷 검색을 하여 보았다.
미국에서 조그만 경비용역 회사를 경영한다고 했다.
강원도민회에도 참석하였다는 기사도 있었다.
그는 미국에 가서 살지만 태어난 고국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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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결혼하는 10쌍 중 한쌍이 다문화 결혼이다.
농촌 지역의 어느 초등학교는 다문화 가정의 학생들이 더많은 경우도 있다고 한다.
경기도 안산의 원곡동은 외국인 거주자 수가 내국인 보다 더많다고 했다.
이미 인구의 2%가 넘는100만명 이상의 외국인이 우리나라에서 자리잡고 살고 있다.
그렇지만 다문화에 대한 차별 의식이 아직도 남아 있어 많은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
그런데 50년도 더 오랜 '50년대외 '60년대에 다문화에 대한 그것도 흑인 혼혈에 대한 차별의식이 얼마나 강했을까?
해방후 남북에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하는 분단 상황 속에서 출생한 샌디김은 강원도 양구에서 성장하였다.
그래도 양부와 어머니가 비록 가난했지만 샌디김을 잘 보살폈고 그는 어려운 형편이지만 학교에 잘 다녔고 친구들과 잘 사귀었고 고생은 많이 했겠지만 연예인으로 데뷔하기도 했다.
지금은 고국을 떠나 미국에서 살고 있다.
이미 그도 칠순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나보다 학교는 늦게 다녔지만 나이는 많았다)
그가 미국에서 활동한 소식을 보면 그가 자란 고국에 대한 향수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제 노년기에 들어선 샌디김과 그 가족의 평강을 기원하며 재회할 날이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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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1 : 중학교 동기인 김정현군이 미국 LA폭동 때 샌디김이 국내 방송사와 인터뷰한 것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고 며칠 전에 나에게 이야기했다. 이 글을 쓰게 된 것도 김정현 군이 양구 아리랑을 작사작곡한 것에 대해 통화를 하다가 샌디김의 이야기가 나왔고 정현이가 샌디김에 대한 이야기를 카페에 올리면 어떠냐고 해서 샌디김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을 두서 없이 생각나는 대로 써보았다.
덧붙임2 : 샌디김에 대한 기사를 검색하였는 데 그가 1992년 LA 흑인 폭동때 동료들을 데리고 한인타운을 보호하러 왔었다는 차질진 법사의 기사와 2006년 중앙일보 기자가 미국에서 인터뷰한 기사가 있어 링크시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2248856
차길진 법사가 LA 흑인 폭동때 샌디김을 만난 기사. 샌디김은 흑인 동료들을 데리고 한인 타운을 보호하러 왔었다고 한다.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179658
2006년 7월 7일 중앙일보 뉴스
“글로벌 코리안 - 김복천은 슬펐지만 샌디는 행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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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6일 강원도민일보 기사
“강원도 돌아가 봉사하고 싶어”양구출신 혼혈 가수 김복천씨
35년 미국 거주… 고향 그리워
“고향에서 봉사하며 노년을 보내고 싶습니다”
미국 LA 코리아타운 중심가인 노르만디와 올림픽가(街) 사거리. 쇼핑 플라자에 한 경비업체 박스가 서 있고 옆에 한 흑인이 주변을 살핀다. B&B 보안회사 대표이자 왕년의 혼혈가수 샌디 김(68·본명 김복천)이다.
양구출신인 김씨는 지난 1981년 미국으로 건너가 음식점,나이트 클럽 등 여러 곳에서 일했다. 이후 물리치료소,페인트 가게 등을 운영하다 경비업체를 창업했다. 김씨는 양구초교(47회)와 성애중학교를 졸업했으며 강원고 제1회 졸업생이다. 어린 시절 양구 송천교 다리 밑 판잣집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어렵게 살아온 김씨는 고교 졸업 후 TBC 9기 탤런트로 연예계에 입사해 1970년 ‘검은빛 블루스’로 가수가 됐다.
이후 1981년 미국으로 건너가 2년 뒤 영주권을 받고,1986년 원주 출신인 정 제니퍼씨와 결혼해 두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김씨는 1994년 한국에 들어와 ‘내 고향은 코리아’를 부르며 활동하기도 했다.
“미국에 와서 매일 하루도 쉬지 않고 16시간씩 일했다”는 김씨는 현재 한인 교포 30명과 함께 코리아타운 쇼핑몰 경비와 아파트 전문 인력 파견 일을 하고 있다. 회사가 안정세를 이루면서 LA다운타운에 개인아파트도 마련했다. 김씨는 “나이가 들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봉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며 “언젠가 양구군의원에 출마해 군민을 돕는 일을 하고 싶지만 너무 늦은것 같다”고 향수에 젖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LA / 송광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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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8일 강원도민일보 기사 http://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777462
김복천씨(샌디김)과 어린시절의 인연이 있어 소식이 너무 반가와서 블로그로 기사를 가져왔습니다. 도민일보의 유료 독자입니다.
저작권이 있는 강원도민일보에서 본인의 기사 전재가 저작권에 위배된다고 지적하여 주시면 기사를 내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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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중앙일보 기사 http://news.joins.com/article/2179658
2008년 뉴시스 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2248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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