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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훈장의 뒤돌아 보기

점수 경쟁으로 인하여 일어난 웃지 못할 일들(1)

처음 교직생활을 시작하던 '7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학교 현장은 극심한 점수 경쟁에 시달렸다.

물론 지금도 입시경쟁은 있고, MB 정권때는 기초학력 평가 때문에 여러 부작용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90년대 중반까지의 점수 경쟁은 이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심하고 부작용도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7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는 학력제고라는 명분하에 학교간 점수를 비교하여 경쟁을 시켰다.

강원도에는 '70년대 후반까지 고교 경쟁입시가 실시되어 춘천, 원주, 강릉에 소재한 명문고에 몇명을 진학시켰는가가 중학교 평가의 주요한 척도였다. 중학교가 평준화되어 있는지라 다른 학교보다 한명이라도 더 명문고에 보내기 위한 학교간 경쟁은 치열하였다.

성적을 올리는 편리한 방법은 주입식으로 수업을 하고 문제풀이를 많이 하여 입시에서 1점이라도 더 득점하게 하는 것이다.

중학교 시기는 발달단계로 볼 때 공부하기 보다는 놀기를 좋와하는 시기라 아이들은 공부보다는 노는 데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 

동기 유발이 되어 있는 상위권 녀석들은 스스로 알아서 공부를 하겠지만 명문고 진학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녀석들은 공부에 관심이 덜할 수밖에 없었다.

명문고 진학비율에 더하여 일제고사를 치르어 학교간 성적을 비교하여 학교를 비교 평가하였다.

명문고 진학율은 춘천 등 시지역의 문제이지 군단위 이하 지역에서는 아주 우수한 학생 몇명만이 해당되는 일이라 전체를 대상으로 닥달을 할 일이 없지만 학교간 평균 성적의 비교는 전 학생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어 모든 학생들을 경쟁에 몰아넣을 수밖에 없었다.

 

한 학기에 두번 정도(3학년은 두 달에 한번 정도)  모의고사라는 일제 고사를 치르었다.

문제는 사설 시험기관에서 출제한 것을 학생 부담으로 구입하여다가 시험을 보았다.

시험을 치르고 나면 즉시 채점을 하고 당일에 성적이 나왔다. 다음날 교감들은 다른 학교에 전화를 하여 성적들을 알아내었다.

교감의 책상에는 지역 학교 이름과 과목을 쓴 표가 놓여져 있었고 교감은 이웃학교 교감에게 전화를 하여 알아낸 성적을 표에 기록하였다. 수업에 들어가지 않은 교사들은 교감 뒤에서 목을 빼고 표에 채워지는 숫자를 들여다 보았다.

성적이 좋지 않은 교사는 울상을 지었고 다른 학교보다 좋은 성적이 나오면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교육청에 성적을 공문으로 보고하고, 교육청에서는 각 학교의 과목별 성적을 취합하여 비교한 공문이 내려 왔다.

학교에서는 이 공문을 보고 평가회를 열었다.

교장이나 교감이 무어라 하지 않아도 성적이 나쁜 교사들은 좌불안석이었다.

일제 고사는 학생들 보다 교사를 평가하는 시험이기도 했다.

이렇게 되니 승부욕이 강한 교사들은 최고의 성적을 얻게 하기 위해, 그렇지 않은 교사들도 꼴찌를 면하고 중간이라도 하기 위해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기적으로 성적을 올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애들에게 학습내용을 주지시키고 문제를 많이 풀어 문제의 유형에 익숙하도록 하는 것이다. 공부를 하기 싫어하는 녀석들을 공부시키는 데는 물리적 압력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물론 이 방법이 장기적으로는 부작용이 많다는 것을 교사들이 모르지 않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 애들을 들볶을 수밖에 없었다.

지역에서 일제히 치르는 모의고사를 앞두고는 미리 진도를 확보하고 예상문제를 풀어 주었다. 시간마다 시험을 보아 성적이 나쁜 녀석들을 매질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또 학습시간을 늘리기 위해 일찍 등교시키고 늦게 하교시켜 자율학습을 시켰으며, 보충수업을 하고 교육과정보다 더 많은 시수의 국영수 수업을 하였다.

정기 고사를 치르거나 일제 고사를 치르거나 시험을 치르고 나면 타작이라는 것이 뒤따랐다.

대다수의 교사들이 성적이 낮은 아이들을 혼내었다. 주로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는 것인데 어떤 녀석들은 시간마다 매를 맞아 종아리가 온통 울긋불긋하였다.

 

모든 학교가 이런 식으로 애들을 들볶지만 등수는 정해지게 되어 있다. 교사의 수업 방법에 따라, 학교 분위기와 환경에 따라 성적이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애들에게 물리적 압력을 가한다고 해도 성적이 오르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경쟁에 스트레스를 받은 일부 교사들은 편법을 쓰기도 하였다.

예산 때문에 문제를 얻어다가 학교에서 프린트를 하여 시험을 치르는 경우에 인쇄한 것이 아니라 문제가 잘 안보이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면 담당 교사가 교실을 순회하며 문제를 읽어 주었는 데 어떤 교사는 문제를 읽으며 진한 힌트를 주기도 했다.

한발 더 나아가 사전에 어떤 교사는 일부 문제를 공개하기도 하였다. 필자가  근무하던 학교에서는 이런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지만 시험을 치르고 나면 온갖 소문이 떠돌았다.

 

이런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교환 감독이라는 것을 했다. 이웃 학교와 감독 교사를 바꾸어 시험을 치르는 것이다.

또 교육청 장학사나 직원이 직접 나와 한 학급을 표집해서 감독하고 입회하여 채점을 하기도 하였다.

본란에서는 이로 인해 생긴 웃지 못할 이야기 한가지만 공개하고 다음 회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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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초에 시골 병설 중고교에 근무할 때다. 소속은 고등학교였지만 병설학교라 중학교 수업도 겸하여서 했다.

군지역 모의고사를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예산이 부족하고 학생들에게 비용을 부담시키는 것도 한계가 있어 교육청에서 문제를 보내어 시험을 치르게 하였는 데 춘천 시내 중학교에서 치를 시험지를 구해다가 시험을 보게 하는 것이다.

학교단위에서 치른 시험이라 출제의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 시험의 원칙인 객관성과 타당성이 결여되고 특정 단원에 문제가 치우치는 과목이 많았다. 이렇게 객관도가 떨어지는 문제지만 교육청에서 시행을 하면 일선 학교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지라 이웃학교와 교환감독을 하였다.

그런데 이웃학교에서 교환감독을 온 수학교사가 교실을 돌아보다가 교무실로 오더니 교감선생님에게 이의를 제기하였다.

교실 칠판에 적혀 있는 자율학습 문제 몇개가 당일 치를 시험문제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문제가 사전공개가 된 것이 틀림없다고 얼굴 표정을 붉혀 가며 항의를 했다.

임기응변에 능한 교감은 일단은 시험을 치러 보고 문제가 있으면 그때 다시 생각을 하자고 이웃학교 교사를 설득하여 시험을 치르었다. 채점을 하고 문항 분석을 하여 보니 공개되었다고 하는 문제의 정답율에 특별한 이상이 없었다.

이웃학교와 성적을 비교하니 오히려 그쪽 학교가 더 높았다.

교감이 학습부장을 불러다 물어 보니 어느 문제집의 문제를 칠판에 베껴 놓았다고 하였다.

춘천 시내 모 중학교 월말 고사 문제를 입수하여 시험을 치르었는 데 그 학교 출제 교사가 참고서에 있는 문제를 그대로 베껴서 출제를 한 것이 우연의 일치로 학습부장이 칠판에 쓴 문제와 일치하였던 것이다.

이웃 학교의 교환감독 교사는 머쓱해서 돌아갔다.

 

다음 날 이웃학교로 교환감독을 갔던 수학선생에게 교감이 전날 있었던 해프닝을 이야기하였다.

20대 후반이던 젊은 수학선생은 열을 받아서 교환감독을 나왔던 이웃학교 선생에게 항의 전화를 하였다. 언성이 높아지며, 고함을 지르고 서로 다투는 것 같았다. 그러자 교감이 전화를 빼았아 이웃학교 교감에게 전화를 했고 이번에는 교감끼리 언성을 높혀가며 싫은 소리를 하였다.

점수 경쟁이 초래한 웃지 못할 해프닝의 한 장면으로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쓴 웃음이 나온다.

 

2013. 10.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