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신동하 교장선생님
공립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다보면 여러 학교로 임지를 옮겨 다니게 된다.
그때마다 상급자와 동료들, 제자들과 만나고 헤어지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인연을 맺고 헤어지게 되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윗분이나 선후배 동료 교사들, 제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한 사람이 기억할 수 있는 인물은 평균적으로 2천명 정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물론 개인에 따라서 더 많은 인물들을 기억할 수 있는 경우도 있겠지만....
37년간의 교직 생활을 하는 동안 모두 23분의 교장선생님을 만났다.
23분의 성격은 모두가 다르며 각각 장단점을 갖고 있고 같은 분이라도 만났던 사람에 따라 평가가 다를 것이다.
이분들 중 참교육자의 모습을 보이셨고, 인격적으로 존경할만한 한 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1978년 7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7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교장과 교사로 만남을 가졌던 신동하 교장선생님이다.
한때 건강이 나빠 군에 입대하였다가 귀향을 당한 후 병역 문제가 복잡하여져서 늦게 병역 의무를 수행하고 복직하여 '78년 7월에 갑천고등학교로 부임하게 되었다.
춘천에서 횡성으로 온 다음 횡성에서 1시간 가까이 기다려 원주에서 갑천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갑천으로 향하였다.
당시 도로는 비포장이어서 버스는 먼지를 일으키며 1시간 가까이 고개를 넘고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갑천에 도착하였다.
아주 산골에 위치한 작은 학교였다.
내가 부임한 7월 24일은 퇴비를 거두고 방학을 하는 날이었다.
짐을 싼 트렁크를 가게에 맡겨 놓고 길을 물어 학교로 향했다.
학교는 면사무소가 있고, 농협이 있는 시장 거리에서 도로를 따라 북쪽 방향으로 조금 가다가 개울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서 위차하고 있었다.
학교에 도착해 보니 학생들은 각자가 퇴비를 베어 리야카에 싣고 와서 무게를 달고 있었다.
남자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운반해 온 퇴비를 무게를 달고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시골학교인데 퇴비를 수거하는 날이라 선생님들이 모두 작업복을 입고 있으니 더 촌스러워 보였다.
퇴비를 수거하던 선생님의 안내를 받아 서무과에 들려 서류를 제출하고 교무실에 내려 와 계시던 교장선생님을 뵙게 되었다.
당시 교장선생님은 50세 가량이셨는 데(그때는 무척 연세가 높아 보였음) 나를 보시더니 반가와 하시면서 컵에 물을 한잔 가득 따라 주시면서 물맛을 보라고 권하셨다.
교장선생님이 첫만남에서 물을 권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좋은 자연 환경을 강조하시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방학식 자리에서 부임인사를 하였다.
신동하 교장선생님은 횡성이 고향이시고 대구사범을 졸업하였는 데 박전대통령의 직계 후배가 되셨다.
강원도 교육위원회에서 중등교육과장으로 계시다가 횡성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학교에 화재가 나서 학교가 타게 되었고 이에 대한 문책으로 오지인 갑천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좌천되었다고 한다.
이때의 일처리 과정이 교장선생님의 인품을 나타냈다고 한다.
화재가 난 날 숙직 교사가 문책을 받게 되는 데(교장도 관리 책임을 지게 됨) 교장선생님은 모든 것은 내 책임이고 숙직교사는 잘못이 없으니 교사를 선처해달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원주의 어느 고등학교에 화재가 났는 데 교장선생님은 책임을 숙직교사 등에게 떠넘겼다고 한다.
두 사례가 비교가 되어 화제거리가 되었다.
당시 중학교는 8개 학급에 400명 정도, 고등학교는 3개 학급(한 학년에 한 학급)에 150명 정도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었다.
지금은 학령 인구가 많이 줄어서 강원도에서 이 정도 학교는 군단위에서는 꽤 큰 학교에 속하지만 당시에는 아주 작은 소규모 학교였다.
2학기가 되어 나는 교련 선생님이 맡았던 1학년 담임을 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학급수에 비해 배정된 교사의 수가 적었고, 중고 병설의 경우 중고교 수업을 겸해서 해야 했고, 소규모 학교에서는 비전공 과목을 수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맡은 교과는 고3 물리, 화학, 지구과학(생물은 농업선생님이 담당) 고2 화학, 중3, 고1, 2 기술, 중2 과학이었다.
수업해야 할 교과서가 8권이 되었다.
수업을 할 생각을 하니 암담하였다.
내 전임자는 한양공대를 나온 분이었는 데 수업에 스트레스를 받아 사임하고 기업체로 취직하여 갔다고 했다.
갑천에 오기 전까지 중학교 수학을 가르쳤는 데 갑자기 맡아야 할 교과목과 학년수가 늘었고 처음 가르치는 과목이니 기가 질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기술교과는 전혀 생소한 과목이었다.
나도 모르는 내용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려는 죽을 지경이었다.
당시에는 교사용 지도서도 없었던 시절이라 학생용 부교재에 의존해서 이것을 가지고 지도안을 만들어 판서하며 수업을 해야 했다.
나도 이해를 잘 못하는 내용을 설명하려니 나도 답답하고 애들도 답답했을 것이다.
밤늦게까지 교재 준비를 해야 했다.
시험을 치를 때면 줄판(가리방)에 원지를 놓고 철필로 글씨를 써서 등사를 했다.
원지에 글씨를 쓰는(긁는) 것은 빨라야 2시간에 3장 정도를 쓸 수 있었는 데 과목당 2장 정도의 원지를 긁어야 했다.
8과목을 시험치르려면 16장 정도의 원지를 긁어야 했고, 긁는 시간만 10시간 이상이 걸렸다.
표를 만들려면 줄을 쳐야 했는 데 이때 원지가 찢어지면 다시 써야 했다.
복직을 하면서 과목을 바꾼 것이 후회가 되곤 했다.
이야기가 잠시 딴 방향으로 흘렀는 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교장선생님은 학생 한명 한명에 대해 관심이 많으셨다.
어떻게 파악하셨는지 상당히 많은 학생들에 대한 정보를 알고 계셨다.
결재를 맡으러 가면 우리반 학생들에 대해 묻곤 하셨다.
담임을 맡은지 얼마 되지 않아 학생들의 신상을 미쳐 파악하지 못한 나는 그때마다 쩔쩔 매곤하였다.
중2를 대상으로 군교육청 주관으로 과학 실험 경시대회를 한다고 했다.
2학년이 세반이었기 때문에 4명이 출전해야 했다.
처음 과학교과를 맡았기 때문에 어떻게 준비를 해야할지도 몰랐고, 안다고 해도 8권의 교재를 가지고 수업을 하는 형편에 준비를 시킬 수도 없었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하고 4명을 인솔하여 출전하였는 데 결과는 관내 8개 학교 중 꼴찌였다.
며칠 후 결과가 통보되었고, 나는 교장선생님에게 "죄송합니다. 다음에 잘하겠습니다."라고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학교 분위기는 성적이 나쁘면 굉장한 질책을 받았다.
나는 꾸지람을 들을 각오를 하고 있었는 데 교장선생님은 단 한마디 "다음에 잘하면 되지요"라고 말씀하시고 더 이상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
굉장한 질책을 받을 각오를 했던 내가 오히려 당황을 했다.
다음해 내가 지도한 학생들이 군대회에서 1등을 하였다.
무엇보다 나는 신동하 교장선생님에게 약속을 지켰다는 데서 뿌듯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원주로 전근을 가신 후지만 1등을 하여서 약속을 지켰다는 편지를 보냈다.
후일에 들은 이야기지만 교장선생님은 나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하셨고 나를 많이 칭찬하셨다고 한다.
11월에 영사기 한대가 학교로 배정되어 왔다.
당시에는 대부분 과학교사들이 시청각 업무를 맡고 있었다.
시청각 교재라고 해야 당시에는 환등기와 OHP, 녹음기, 카메라 등뿐이었다.
이들 기재도 학급수에 따라 다르지만 중고별로 환등기와 OHP는 한대씩 배정되어 있었는 데 교재가 없어 거의 활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영사기는 당연히 내가 책임지게 되었다.
영사기는 극장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고 학교에 배정된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영화를 상영할 수 있다는 것은 많은 기대를 갖게 하였다.
교장선생님은 육성회(지금의 학교 운영위원회) 임원들 앞에서 영사기를 시연하라고 말씀하셨다.
군교육청에서 필름을 빌려 왔다.
문제는 내가 기계치라 어떻게 작동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었다.
육성회 임원들이 모이는 날은 닥쳐 오고 내 속은 타들어 갔다.
교감선생님에게 애로 사항을 말씀드렸다. 교장선생님이 부르시더니 도저히 작동을 못하겠으면 영사기를 잘다루는 선생님을 모셔 오겠다고 했다. 과학 선생이 시청각 기재 하나 못다루느냐는 질책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교감선생님은 기계를 잘다루는 성선생에게 영사기를 돌려 보라고 했다.
성선생은 영사기를 보더니 어떻게 어떻게 해서 필름을 끼우고 수동으로 작동하여 영사기를 작동시켰다.
필름이 돌아가며 스크린에 영사가 되었다.
급한 불은 끄게 되었다.
나는 그날 영사기 매뉴얼을 집으로 가져 와서 밤을 새 번역을 하였다.
다음날 모두가 퇴근한 후 교무실에서 영사기를 꺼내 놓고 번역한 매뉴얼을 보며 자동으로 영사기를 작동하였다.
Bell&Howell 이라는 기종이었는 데 구형은 수동으로 작동하는 것이었지만 학교에 배정된 것은 신형이라 필름을 끼우고 스위치를 누르면 자동으로 작동되는 것이었다.
다음 날 교감선생님 앞에서 자동으로 영사기를 작동하였다.
교감선생님은 역시 과학선생이라 국어 담당인 성선생은 수동으로 작동했지만 자동으로 작동했다고 칭찬을 했다.
육성회 임원들 앞에서 영사기의 시연은 무사히 끝났다.
담당 교사의 무능을 나무라지 않고 못하면 할 수 있는 다른 분을 불러다가 하면 된다고 하신 교장선생님의 배려가 지금도 기억된다.
학년말이면 담임들은 생활기록부를 작성한다.
생활기록부에는 성적과 행동발달이 기재된다.
그리고, 학생의 교과성적과 학교 생활에 대한 종합적인 기술이 있게 된다.
교장선생님은 학생들의 행동발달 평가와 기술에 대해 굉장한 관심을 가지셨다.
학생의 특성을 잘 파악할 수 있도록 하고 학생의 장점에 대한 긍정적인 표현을 강조하셨다.
그리고 각 학생 한명 한명에 대한 기록을 꼼꼼이 살피셨다.
생활기록부 작성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교장선생님에게서 생활기록부 작성에 대한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몇년 뒤 춘천 여중에서 근무할 때 교감선생님이 가정 통신문과 생활기록부 작성에 대해 강조를 했는 데 조회시간에 내가 쓴 것을 보라고 하였다.
학교에는 학생과 교사가 어우러져 생활하다 보니 이로 인한 많은 이야기거리들이 생겨난다.
교사와 교사,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 사이의 얽힌 이야기들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교사와 교사 사이의 얽힌 일과 교장 선생님의 현명하신 처리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당시 시골학교에는 젊은 선생님들이 주로 근무하였다.
경력 교사들은 도시로 전출하고 신규교사들이 시골로 발령받았기 때문이다.
필자가 근무하던 학교 역시 대부분 30세 미만의 젊은 교사들이었다.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김선생과 역사를 가르치던 조선생은 각각 20대 중반의 젊은 교사였다.
조선생은 갑천이 초임학교였고 김선생은 군에 갔다와서 처음 부임한 학교였다.
젊은 남녀가 모이다 보면 큐피드의 화살이 꽂히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김선생이 조선생에게 연정을 느끼고 접근하게 되었다.
조선생은 언니가 시집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선뜻 김선생의 구애를 받아드릴 수 없었다.
거절을 하였지만 김선생은 끈질기게 조선생을 귀챦게(?) 하였다.
조선생은 아버지가 대학교수였고 집안이 좋왔지만 김선생은 부모님이 농사를 짓고 조부모님까지 생존해 계신 집의 장남이었다.
조선생 집에서는 싫다고 할 수밖에.....
김선생을 못마땅하게 여긴 조선생의 어머니가 교장선생님을 찾아왔다고 한다.
교장선생님을 만난 조선생의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 김선생을 혼내서 조선생을 귀챦게 하지 말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한다.
교장선생님은 조선생 어머니가 하는 말을 아무 말 없이 끝까지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셨다고 한다.
"김선생의 어느 점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김선생을 싫다고 한다면 다음에 김선생보다 나은 사위를 얻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조선생의 어머니는 이말을 듣고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둘의 사랑은 맺어지게 되었고 결혼을 하여 잘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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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하 교장선생님은 박정희 전대통령의 대구사범 후배로 당시에는 목에 힘을 줄 수가 있었지만 항상 겸손하셨고, 관료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부하직원들의 잘못이 있더라도 직설적으로 나무라지 않고 어려움을 배려하여 주고 스스로 잘할 때까지 믿고 기다려 주셨다.
학생 한명 한명에 대한 관심을 가지셨고, 그들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라는 것을 강조하셨다.
어떤 일이 발생하면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미루지 않고 보호하며 자신이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이밖에 교장선생님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많지만 필자의 표현력이 부족하여 다 쓸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나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며 참된 스승의 모습을 보여 주신 교장선생님과 함께 근무한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한다.
교장선생님이 보여 주신 모범은 나의 교직생활에 큰 귀감이 되었다.
2013. 8. 31
덧붙임 :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신동하 교장선생님은 2011년에 별세하셨다고 한다. 생전에 찾아뵙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