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훈장이 만난 사람들

우리집 세입자들 이야기(2) - 갈등으로 이혼한 젊은 부부

시골 훈장 2024. 8. 31. 16:54

 

춘천시 효자동에 있던 우리집은 1930년대에 건축된 집이었는 데 기와집이기는 했지만 아주 낡은 집이었다.

큰댁에서 사시던 집이었는 데 1965년 춘천에 이사를 오면서 우리가 인수를 하여 수리를 해서 살게 되었다.

집은 우리 명의였지만 대지는 사천 목씨네 문중 땅으로 해마다 일정액의 도지를 내야 했다.

방이 6칸이었지만 안방을 제외하고 나머지 5칸은 쪽방보다 조금 큰 정도의 작은 방들이었다.

안방과 웃방, 마루 옆에 달린 방 한칸은 우리가 쓰고 나머지 3칸은 세를 주었다.

1965년에 이사를 와서 1990년에 아파트로 거주지를 옮기고 1992년 집을 헐 때까지 우리집에 입주해서 살던 세입자들의 삶에 대해 기억나는 것을 쓰고자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낡은 목조와가 주택의 좁은 방에 입주해서 사는 분들의 생활은 대부분 어려운 편이었다.

30년 가까이 사는 동안 많은 분들이 옆방에 입주를 하고 일정 기간동안 거주하다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길게는 몇년간 짧게는 한두달을 살다가 떠난 이분들을 모두 기억할 수 없지만 인생의 경험과 연륜이 어느정도 쌓인 조금은 철이 든 지금의 관점에서 생각나는 대부분 하층민이었던 그분들의 삶의 모습을 돌아보고 재해석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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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 1970년대만 해도 이혼이 흔하던 시대는 아니었다.

물론 이혼한 부부가 있기는 했지만 흔한 경우는 아니었다.

또한 이혼한 사람들은 주변에서 선입견을 가지고 보는 주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작은 방이 여러 개인 '30년대에 지어진 우리 집에는 여러 세대가 입주하여 북적대며 살았다.

1969년엔가 두 살 남자 아이와 20대 초중반의 젊은 부부가 세입자로 들어왔다.

남편은 20대 중반의 화물차 운전사였고 아내는 20세가 갖 넘은 젊은 엄마였다.

필자는 학교에 출석하느라 낮에는 집에 없었기 때문에 이들 가정의 일은 알 수 없었고 관심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말씀에서 이들 가정에 불화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자의 친정 어머니와 가족은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부부는 자주 다투었는 데 싸우고 난 다음 날에는 친정 엄마가 와서 사위에게 욕설을 퍼붓고고 손지검을 하고 난리를 피운다고 했다.

남편은 온순한 성격의 사람으로 장모에게 막말과 손지검을 당하여도 맞대응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폭언을 당하기만 했다고 한다.

당시는 대문을 열어놓고 사는 시대라 집안은 이웃에게 개방되어 있었고 수시로 이웃 집을 방문하는 것이 보편적인 시대였다. 이들 부부의 불화는 이웃들 모두에게 알려졌다.

당시 선친께서는 초등학교 교감으로 인제에서 근무하고 계셨는 데 어느 주말 집에 다니러 오셨다가 부부를 안방으로 부부르셨다. 선친께서는 좋은 말로 부부에게 불화하지 말 것을 충언하셨다.

그러나 어른의 타이름도 소용이 없었다. 이들의 불화는 점점 깊어만 갔고 부부 싸움은 일상이 되었고 이어 친정 엄마가 와서 난동을 부리는 일이 반복되었다고 한다.

하루는 일찍 귀가하여 낮잠을 자는 데 옆 방에서 이웃 아주머니들이 젊은 여자를 타이르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참고 살으라는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젊은 여자는 아이가 생길까봐 남편과 잠자리까지 거부한다고 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그러면 안된다고 했다.

 

이들 부부의 불화는 점점 깊어지고 마침내는 대판 싸우고 별거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남자는 아기를 데리고 본가로 가버리고 말았다. 이때 서울에 사는 여자의 사촌언니가 왔다고 한다.

동생을 불러 다부지게 혼을 내고 남편에게 사과를 하고 다시 합치라고 했다고 한다.

여자는 언니의 말에는 순종을 했는 데 남편에게 사과를 했으나 돌아선 남편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이미 갈라지기로 한 남편의 마음은 완전히 굳어졌던 것이다.

아기는 아빠가 데리고 본가로 가고 여자는 친정으로 가고 이렇게 가정은 이혼으로 해체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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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루는 서면에 사시는 큰어머니가 오셨다. 큰어머니는 우리 집에 자주 오셨기 때문에 우리 집에서 살던 여자를 알고 계셨다. 큰어머니께서 우리집에서 살았던 여자가 이웃집 며느리로 들어왔다고 하셨다. 나는 큰어머니에게 절대로 새 시어머니에게 우리 집에서 보았다는 말씀을 하시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드렸다.

이혼한 것을 새로운 시집에서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모르고 있다면 굳이 과거사를 알려주어 새로 이룬 가정에 갈등을 일으키게 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했다.

몇년이 지나 서울을 다녀오는 데 기차 안에서 남자의 동생을 만났다. 젊은 부부가 우리 집에 살 때 가끔 형에게 다니러 온 초등학생이던 소년을 본 적이 있는 데 몇년 동안에 많이 커서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전 형수의 소식이 궁금한지 나에게 근황을 물었다.

나는 재혼해서 어디에선가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적이 있다는 정도로 대답하여 주었다.

아이는 잘 크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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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강은 멈추지 않고 흐르는 법이다.

몇년의 시간이 또 지나갔다. 서면에 와서 살던 여자는 또 이혼을 하였다고 한다.

어떤 갈등 요인이 두번째 이혼을 불러왔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두번씩이나 가정이 해체되는 불행을 겪은 데 대해 연민의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다시 세월은 흐르고. 필자도 나이를 먹다보니 친구와 직장 동료와 친인척의 경조사에 참석하는 기회가 많아지게 되었다.

옛날 시외버스 터미널 근처에 강원예식장이라는 예식장이 있었다.

당시에는 행복 예식장, 강원 예식장 등이 춘천에서 큰 예식장이었다. 강원 예식장은 터미널 가까운 곳에 있어 혼사와는 관계가 없는 객들이 많이 와서 먹고 간다는 소문이 나있었다.

예식이 끝나고 식사를 하고 있는 데 머리는 헝클어지고 남루한 옷을 입은 70이 훨씬 넘어 보이는 노파가 들어와서 하객들이 먹다가 남긴 음식을 비닐 봉지에 쓸어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낯익은 인물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니 우리 집에 세들어 살던 부부의 친정 엄마였다.

딸 부부가 부부 싸움을 하면 달려와서 사위에게 행패를 부렸던 여자였다.

옆에서 식사를 하던 분이 두 모녀가 허름한 쪽방 같은 데서 살고 있는 데 가끔씩 예식장에 와서 하객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거두어 간다고 했다. 이들 모녀의 일생에 대한 큰 그림이 그려졌다.

모성애가 너무 강해(?) 항상 딸의 편에 섰던 엄마. 그러나 불행하게도 딸은 이혼을 반복해서 하고 나중에는 두 모녀가 극빈층으로 내몰리게 되었고 주말에 예식장에 들어가 하객들이 먹다 남긴 음식물을 수거해다가 먹고 사는 데 보태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불행의 나락에 떨어진 두 모녀의 이런 모습을 보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아울러 남편과 아이는 어떻게 지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남자는 운전 기술이 있었으니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을 것이고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살았을 것이다.

첫 결혼의 불행을 끊어내고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