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훈장의 뒤돌아 보기

교사 초임 발령을 받고 모교로 부임하다

시골 훈장 2023. 2. 28. 11:31

1973년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싶었으나 군입대가 9월로 예정되어 있어 병역필을 기본자격으로 하는 기업의 공채에 응시할 수가 없었다.

교직과정을 이수하였으나 농업계 자격증이라 교사채용을 하지 않아 무용지물이었다.

그렇다고 군입대를 할 때까지 허송을 할 수도 없었고.

고육책(苦肉策)으로 택한 것이 대학원 진학이었다.

군입대 전까지 할 일이 있고 제대를 하고도 돌아올 자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대학원생 생활은 눈코 뜰 쌔없이 바빴다.

실험준비와 정리, 학부생 과제물 처리, 실험 보조 등...

 정신없이 한 학기가 지나고 군에 입대하였다.

 

그러나 건강에 이상이 있어 귀향조치를 당하고 실의에 빠졌다.

다음 해에 다시 신검을 해서 입대 여부가 결정되는 데 병역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는 병역미필이니 취업에 제한을 계속 받을 수밖에 없고.

가정의 경제적 형편이 어려웠고, 동생들이 고등학교 대학에 진학을 하게 되는 데 나혼자 공부를 하겠다고 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마침 경상북도에서 교사 채용을 한다는 광고를 보고 대구에 가서 응시를 하였다.

운 좋게 1등으로 합격을 하였다.

순번이 빠르니 발령을 받을 것이라 기대하고 대학원 등록을 하지 않고 휴학을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발령이 나지를 않았다.

경북 도교육위원회에 연락을 해보니 자리가 없다고 한다.

학교는 휴학을 했으니 나갈 곳은 없고.

하루라도 빨리 경제적 활동을 해야 하는 데 기약없이 발령나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고.

밥알을 씹는 것이 모래알을 씹는 것 같았다.

짧은 기간인데도 취준생 생활이 힘들었는 데 장기 취준생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있다.

 

대책없이 시간만 보내는 데 하루는 초등학교 교감으로 근무하시는 사촌형님이 강원일보를 가지고 오셨다.

하단 광고에 강원도에서 중등 교사 채용을 하는 데 필자의 전공이 화학과에 포함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광고가 눈에 번쩍 띄었고 어두움 속에서 한줄기 빛처럼 느껴졌다.

즉시 응시원서를 내고 시험준비에 들어갔다.

같은 교과로 3월에 임용되어 근무하고 있는 대학 기독교 동아리(CCC) 후배에게 연락을 해서 출제 경향과 시험준비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시험공부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는 데 강원도 교육위원회에서 전보가 왔다.

수학과로 임용할 예정인데 교육위원회에 와서 면담을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도교육위원회에 갔더니 수학담당 장학사인 김한기 장학사님이 필자를 면담하였다.

장학사님 말씀이 강원도에 수학교사가 부족하여 수업을 못하는 학교들이 있다.

화학과로 임용되려면 시간이 걸리는 데 수학과를 희망하면 즉시 발령을 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이를 수락하자 김장학사님은 필자에게 중3 교과서를 주면서 한시간분량의 수업안을 짜보라고 했다.

전에 수학과외를 한 경험이 있는지라 한시간분 수업안을 작성하여 제출하였더니 김장학사님은 크게 만족을 하면서 고등학교로 발령을 내주겠다고 했다.

학기 중이라 고등학교에서 수업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고 했더니 중학교로 발령을 내줄 터이니 원하는 학교를 골라보라고 했다.

수학교사가 공석인 학교가 12개 학교인데(주로 농산어촌) 필자의 모교가 있었다.

김장학사님은 필자의 모교인 양구중학교가 있는 양구군으로 발령을 내주겠으니 다음날까지 임용에 필요한 서류를 구비하여 제출하라고 했다.

김장학사가 발령 절차를 설명하는 동안에 양구중학교에서 빨리 교사를 보내달라는 독촉 전화가 왔다.

김장학사는 곧 우수한 교사를 보낼 터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대답을 하였다.

 

필자는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필요한 서류를 갖추어 제출하였다.

김한기 장학사님은 서류를 검토하고 기안을 하여 결재를 받더니 즉석에서 발령장을 교부하였다.

당장 양구 교육청으로 가서 발령장을 제출하고 보고를 하라고 했다.

준비에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했더니 이유가 많다고 하면서 당장 짐을 꾸려서 양구로 떠나라고 독촉을 하였다.

 

 

집에 와서 번개불에 콩을 굽듯이 서둘러 준비를 했다.

문제는 넥타이를 매는 것이었다. 넥타이를 매보지 않아 맬 줄을 몰랐다.

옆방에 사는 세입자 아주머니가 넥타이를 들고 동네 이집저집을 헤매어 겨우 넥타이 매어서 왔다.

양구 교육청에 도착하여 도 발령장을 제출하고 근무지 지정 발령장을 받아 양구중학교에 도착하니 퇴근시간 직전이었다.

교감선생님이 고등학교 때 사회 선생님이어서(우리반 수업을 담당하시지는 않았지만) 무척 반가웠다.

교직원들에게 부임 인사를 하였다.

교무과장님이 내일부터 출근을 하라고 하였다.

 

이모낵에서 하루를 자고 출근을 하였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모두 운동장에 집합시켜 놓고 나를 소개하였다.

1965년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양구를 떠난지 9년만에 교사가 되어 모교로 돌아온 것이다.

5월 31일 첫출근을 하였는 데 내 출근부가 없었다.

교무 선생님께 왜 출근부가 없느냐고 물었더니 6월 1일자 발령이니 내일부터 출근부에 날인을 하라고 한다.

오늘 하루는 무보수로 일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법정 발령날짜보다 앞서서 수업을 한 교사는 거의 없을 것이다.

수업에 들어가서 진도를 확인해 보니 3월부터 5월까지 수학교사가 공석이어서 3개월을 정상적인 교과 수업을 하지 못하였다.

처음 6주간은 교생이 수업을 대신하였으나 교생이 돌아간 후 6주간은 교과수업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뒤쳐진 진도를 확보하며 수업하느라고 고생을 하였다.

집을 리모델링하며 정리를 하다가 이때의 상황을 간략하게 기록한 일기를 발견하였다.

아래는 당시의 일기에서 발췌한 것이다.

 

1974529

임용에 필요한 서류를 갖추어 교육위원회에 갔더니 당장 내일 떠나라고 한다. 

양구중학교로 갈 것이라고 한다.

그간 몇 년간을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통의 시간을 보냈던가?

모든 것이 꿈만 같다.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인사를 하러 큰댁에 갔다.

 

530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정장을 하고 임지로 떠났다.

나는 10년 전 고교 진학을 위해 양구에서 춘천으로 나가며 이런 맹세를 했다.

다시는 가난하지 않겠다. 내 뜻을 이루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겠다.

아버지께 어머니께 감사한다.

교육청에 들려 발령장을 받고 학교에 와서 양순석 교감 선생님을 만났다.

임시로 이모댁을 숙소로 정했다.

 

531

첫 출근 날이다

김회가 무량했다.

옛날 나의 피땀이 어린 곳.

내가 꿈꾸고 희망했던 길을 가는 것이다.

내가 걸으려던 길을 걷는 것이다.

후회도 회한도 없다. 정년으로 물러나는 날까지 이 길을 걸을 것이다.

교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첫 수업을 들어갔다.

진도파악을 했다.

 

62

일요일인데도 학생들에게 학교에 등교를 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교사들도 나와야 했다.

자수 간첩의 강연을 듣게 하기 위해 공휴일인데도 학생들을 등교시킨 것이다.

시시한 반공강연이었다

이날 이후 일요일에 학생들을 등교시키는 일은 없었다.

 

6월 3일

정학을 당한 녀석들 몇명이 교무실에 와서 청소를 하며 벌을 받고 있다.

숙직 교사가 출근준비를 하러 자리를 비우고 주번 교사가 도착하지 않은 틈새 시간에 

(원칙은 주번교사와 숙직교사 사이에 인수인계가 이루어져야 하는 데 주번교사가 늦게 출근)

교무실에 들어왔던 학생이 아무도 없자 호기심에 캐비넷을 열었고(잠그지를 않은 과오가 있음)

여기에 중간고사 시험지가 있어 이를 빼내 몇명이서 돌려본 것이 발각이 되어 일부 과목을 재시험을 보았다.

 

(당시 학교생활은 군대식이었다.

교무실에 용무가 있는 학생은 출입문 앞에 차렷자세로 서서 거수 경례를 하며 "멸공, 0학년 0반 000 교무실에 용무가 있아 왔습니다"라고 복창을 하고 교무실에 들어와야 했다. 

또 수업태도가 불량하거나 말썽을 부린 녀석들은 교무실에 끌려와 벌을 서거나 체벌을 받았다.

쉬는 시간에는 용무가 있어 교무실에 온 학생들, 벌을 받으러 온 녀석들로 인해 교무실이 북적거렸다)

 

69

집에를 갔다. 가족들을 다시 만나니 무척 기뻤다.

경호와 승래에게 전화를 했다.

교회에 출석하였다.

어린이 예배에서 설교를 했다.

 

610

학교에 출근하여 수업을 하고 퇴근하는 직장인의 일상이 반복된다.

수업시간은 22시간이고 2학년 3개 반과 1학년 2개반을 담당한다.

3학년과 1학년 2개반은 선배가 담당을 하여 모두 10개 학급을 둘이서 나누어 맡게 된다.

수업 공백으로 뒤쳐진 진도를 확보하느라 바쁘다.

 

617

첫 월급을 탔다. 총액 47,809원 중 44,100원을 수령했다.

난생 처음 얻는 소득이다.(전에 알바를 해서 소득을 얻은 적은 있으나 취직을 해서)

난 그 돈을 세보고 또 세어 보았다.

절반 정도를 어머니께 드리고, 처음으로 동생들에게 용돈을 줄 수 있어 자식과 형노릇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숙비와 내 용돈과 교회에 낼 헌금을 따로 분리해 놓았다.

소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622

첫월급을 가지고 집에를 갔다. 어머니는 너무 기뻐서 눈물을 흘리셨다.

1970년 부친이 별세하신 후 5년간 어머니는 남은 5명의 자식들을 부양하고 공부시키시느라

온갖 고생을 다하셨다.

자식이 취업을 하여 처음으로 월급을 타니 감회가 크셨을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아들 노릇을 형 노릇을 했다.

꽉 막힌 상황 속에서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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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때 장래 희망은 교사였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여보니 다른 좋은 직업들이 눈에 띄었다.

大를 나오면 은행이나 대기업에 취직하여 봉급을 많이 받는다고 하였다. 

이말에 솔깃하여 상대를 가겠다고 목표를 정했으나 이것은 내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상대 진학은 내 능력으로는 불가능했고 다시 사범대 진학으로 목표가 수정되었다.

목표한대로 사범대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

재수를 하려고 보니 경제적 능력이 실감되었다. 우리집안 형편으로는 서울 학원에 가서 재수할 수가 없었다.

집에서 재수를 한다고 시간을 허송하고 먼저 응시하였던 학교에 다시 도전을 하려니 도저히 능력이 미치지 못하였다. 

부친이 초등교사라서 우리집이 경제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사범대 진학을 하지 않고 농화학과에 진학을 했다.

그러나 돌고돌아 다시 원래의 꿈이었던 교사로 원위치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