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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에 얽힌 이야기

시골 훈장 2021. 5. 12. 12:26

전화기는 의사 전달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준 문명의 이기다.

전신 전화가 나오기 전 먼거리의 사람과 소통하려면 직접 가거나 대신 전언을 할 사람을 보내야 했다.

문자를 사용한 후부터는 서신을 통해 의사전달을 보다 분명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직접 방문하거나 다른 사람을 보내거나 서신을 보내는 경우에는 신속성에 문제가 있었다.

쌍방향으로 의사소통을 해야 할 경우 왕복에 시간이 걸려 거리가 먼 경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려야 의사소통이 가능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신속성을 보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이 고안되었다.  봉화나 편지를 매단 전서구(비둘기)를 날리거나 걸음이 빠른 보발꾼을 보내거나 역참제도 수기신호를 이용하였다.

봉화나 역참제도는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당시로서는 가장 빠른 통신수단이었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방법들은 속도에 차이는 있겠지만 일정한 시간이 걸리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구가 행해져 왔고 1845년 모스전신으로 원거리에 실시간 통신이 가능해졌고 1852년경부터는 유럽에 전신망이 보급되었다

1891년 무선통신이 시작되었고 1901년에 대서양을 건너는 무선통신이 시작되었다.

우리나라는 1885년부터 전신이 시작되어 신속한 정보전달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전신의 발명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직접 사람이 가지 않고 신속한 정보전달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보 역시 직접 대면하거나 음성을 통해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

1876년 벨이 음성신호를 전기신호로 전환할 수 있는 전화기를 발명하여 원거리에서 음성을 통한 대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896년부터 전화가 사용되었으며 이를 관리하는 정부 부서가 생겼다고 한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전화와 전신을 이용한 원거리에서 의사전달이 가능하게 되었다.

물론 외국과의 통신도 가능하여져서 정보전달의 시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되게 되었다.  

비록 전화가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나 정부기관이나 기업 일부 부유층에서 이용되었을 뿐 일반 가정에 보급되기까지는 거의 한세기가 소요되게 된다.  

 

필자가  어린시절 시골에서 전화기가 있는 집은 없었다.

학교에서도 전화기를 본 기억이 없다.

시골 지역에서는 면사무소와 지서 등 행정기관과 큰 상점 등에 전화기가 있었을 뿐 일반 가정에서 전화는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내가  처음 전화기를 본 것은 초등학교 3학년때인 1958년 5월이었다.

당시 학교가 있는 마을에서 이웃마을로 가는 길은 양양 남대천을 따라 나있었는 데 절벽을 따라 가는 길이 있었다. 

잔치 집에서 한잔을 하시고 술이 취해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시던 노인 한분이 절벽길을 따라 가다가 실족사를 하셨다.

다음 날 발견되었고 경찰이 사고를 조사하러 출동하였다.

우리는 학교에서 그 소식을 듣고 강가 쪽 길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흰 옷을 입은 사람이 절벽 밑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모습이 보였다.

경찰관이 전신주의 전화선에 전화기를 연결하여 무어라고 전화를 하였는 데 이때 전화기를 처음 보았다.

 

양구로 전학을 온 후 읍내 가게에 놓여있는 전화기를 지나면서 본 적은 있지만 직접 전화를 걸거나 받아본 적은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야 처음으로 전화를 해볼 기회가 있었다.

'60년대 중후반 전화를 하려면 전화국에를 가야 했다.

전화기 앞에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경우에 따라 달랐지만 1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전화를 할 수 있을 때도 있었다.

지급이라고 해서 통화료의 2배를 내면 빨리 통화할 수 있었다.

통화의 질도 좋지 않았다. 

잡음이 섞이거나 감이 나빠 상대방이 말하는 것을 알아듣기 어려워 반문하다 보면 기본 통화시간이 지나가서 통화요금을 더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학에 다닐 때는 과 사무실과 교수들 연구실마다 전화가 가설되어 있었다.

학교에 교환원이 있어서 전화기를 들고 교환원에게 통화할 번호를 말하면 연결을 해주었다.

전화를 수신하는 것도 외부에서 걸려온 전화를 교환원이 사무실이나 연구실로 연결하여 주어 받을 수가 있었다.

 

1974년  교사발령을 받고 양구에 부임을 하였다.

중고가 병설되어 있어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같은 교무실을 사용했다.

중고 두분 교감선생님이 책상을 나란히 하고 앉아서 집무를 보았고 각 과별로 책상이 배치되어 있었다. 전화기는 교감선생님 책상에만 놓여 있어 30명이 넘는 교사들이 두 대의 전화기를 사용해야 했다.

당시 전화기는 아래와 같은 형태로 손잡이를 돌리면 전화국의 교환대에 신호가 표시되고 교환원이

발신자와 수신자를 연결하여 주어 통화를 하는  자석식 전화기였다.

당시는 전화요금이 비싸서 꼭 필요한 경우만 전화를 썼고, 짧은 시간에 용건만 전달하는 통화를 했다.

당시에 사용하던 자석식 전화기 

 

또 용무가 있어 전화를 하려 해도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분이 수화자의 상급자인 경우가 많이 웬만큼 중요한 일이 아니면 통화를 자제하였다.

또 통화하는 내용을 실내에 있는 근무자들이 모두 들을 수가 있어 극히 사적인 내용의 대화를 하기에는 부적절한 경우도 있었다.

교사들의 경우 수업 등으로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많이 이때 걸려온 전화는 송화자와 전화번호를 메모하여 당사자에게 알려주었다.

시내 통화의 경우 통화요금이 기본요금 안에 포함되거나 가격이 저렴하여 용무가 있으면 언제든지 쓸 수 있었으나 시외전화의 경우는 달랐다. 시외통화를 한 경우는 반드시 통화한 번호와 함께 공사구분을 기재해야 했다.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평범한 개인이 전화를 가설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전화 회선은 부족하고 가설 희망자는 많기 때문에 전화국에서는 우선순위를 정하여 전화 가설을 하여 주었다.

국가 행정기관이나 공안기관이 1순위였고 교육기관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또 개인 기업이나 사업체의 경우 그 규모에 따라 순위가 정해졌다.

개인의 경우 규모가 큰 정부기관이나 공공기관의 장인 경우 윗순위였으나 평범한 가정의 경우 가장 뒷순위가 되어 신청에서 가설까지 2년 가까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필자가 대학에 재학하던 시절 공무원으로 일찍 취업한 친구가 전신전화국에 다녔는 데 감사를 받느라 고생을 했다고 했다.

감사의 주된 내용은 특혜로 우선순위를 어긴 것이 있는지 여부였다고 한다.

선배 직원이 대학시절 은사님이 신청한 전화가설에 특혜를 주었다고 해서 애를 먹었다고 했다.

 

'70년대에는 시내는 대부분 다이얼을 돌리는 자동식 전화로 바뀌었으나 농촌 지역은 자석식 전화기와 교환 시스템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70년대 중후반과 '80년대 초 필자가 근무하던 학교는 농촌과 광산지역이었기 때문에 자석식 전화기를 사용했고 교환을 통해 통화연결이 되었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며 전화기의 보급이 확대되어 일반 가정에도 전화를 가설하게 되면서 통화량이 부쩍 늘기 시작했다. 

필자가 탄광지역인 지금은 카지노가 있는 고한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교무실에서 근무하는 교직원의 수가 30명에 가까우나 전화기는 한대밖에 없어 전화기 앞은 늘 붐볐다.  

교장선생님의 성격이 특이하여 교사들이 주말에 근무지를 떠나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주거 환경이 열악한 탄광지대라 대부분 춘천이나 원주 지역에 거주하며 근무하다가 토요일에는(당시는 주 5일 근무제가 아니었음) 귀가하였고 근무여건이 나빠 주로 신규발령자들이 배치되었기 때문에 일부 주임교사(지금의 부장교사) 급을 제외하고는 거의 신규발령자라 2/3가 20대였다. 

젊은 교사들은 주말만 되면 근무지를 벗어났다.

당시 정선 고한지역은 도로사정이 열악하여 열차를 이용해야만 했다.

12시 50분과 4시 5분에 고한역에서 열차를 타야 영월 제천을 거쳐 원주로 갈 수 있었다.

토요일에는 3교시로 수업을 끝내게 시간표를 짰기 때문에 학생들을 귀가시키고 근무시간(13시 퇵근)에 조금 융통성을 발휘하면 12시 50분 열차에 탑승할 수 있었다.

특히 봉급날인 17일 주일의 토요일에는 대부분의 교사가 귀가했는 데 교장선생님은 일부러 조회를 길게 하여 수업이 늦게 끝나게 함으로 12시 50분 차를 탈 수 없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 젊은 교사들이라 친구나 애인과 만날 약속을 했는 데 이것이 어그러지게 되어 3교시에 수업이 있는 교사들은 상대방에게 변경내용을 알려야 했다. 

일시에 많은 사람이 전화기 앞에 몰리다 보니 전화기 앞은 줄을 서서 기다리는 교사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1984년이 되면서 손잡이를 돌려서 교환을 통해 전화를 하던 자석식 전화기가 사라지고 다이얼만 돌리면 시외통화까지 가능한 자동식 전화기가 설치되었다.

필자의 집에 전화를 가설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시외전화가 간편해지게 되자 시외전화 통화가 폭증하였다.

대부분 전화번호 사용부에 사용 내역을 기록하였으나 때로는 미처 기재를 누락하는 경우도 있어 서무과장(지금의 생정실장)은 통화요금 때문에 신경을 썼다.

고지된 전화요금과 전화번호부에 기재되어 징수되는 전화요금의 차이가 클 경우 서무과에서는 전화국에 연락을 하여 명세표를 뽑아와서 통화한 번호를 보고 통화 당사자를 추적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이 당시에는 시외전화요금이 비쌌다.

처음 자동식 전화기를 놓은 평창의 어느 총각이 서울에 있는 여자친구와 매일같이 전화로 데이트를 하며 수다를 떨다가 수십만원의 전화요금 폭탄을 맞았다고 한다. 

이 돈을 마련할 수가 없어 난감해 했는 데 전화국에서 기계 오류로 요금을 감해주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했다.

 

1985년에 춘천으로 근무지를 옮겼는 데 이때에는 절반 이상의 학생들 가정에 전화가 보급되어 전확기가 더 이상 부유증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1987년경부터는 자석식 전화 시스템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고 전국이 다이얼만 돌리면 연결되는 시대가 되었다.

동시에 통화요금도 인하되게 되어 전화요금으로 인한 신경전도 사라지게 되었다.

'80년대 후반이 되면서 대부분의 가정에 전화가 보급되었으나 유선전화로 통화를 하려면 전화기가 있는 곳까지 움직여야 했다. 

사람들은 점점 편리한 것을 추구하게 된다.

이때 나온 것이 전화기에서 일정한 거리 이내에 있으면 통화가 가능한 무선 전화기였다.

자동차 정비공장을 하는 친구는 이 전화기를 들고 일을 했다.

학교에도 이 전화기가 보급되어 당직 교사들은 관사에 있으면서 근무를 할 있게 되었다.

'90년대 중반이 되며 무선호출기(삐삐)라는 것이 보급되어 이동 중에도 연락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삐삐는 청소년들에게도 보급되었고 서비스가 제공되었는 데 필자가 근무하다 떠난 학교에서 삐삐로 서비스를 과다 이용하여 요금 폭탄을 맞은 학생이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자 농약을 마시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불행한 일까지 있었다.

 

1999년 필자는 양구에서 다시 춘천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이때는 손전화(핸드폰)가 보급되기 시작해서 학생들 중에도 이를 소지한 애들이 많게 되었다.

수업시간 중에도 교사 몰래 핸드폰을 조작하여 서로 연락을 하는 등 수업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애들이 있게 되어 생활지도의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때 핸드폰을 소유하려면 기기 구입과 운용에 적지 않은 돈이 들어 부모에게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켰다. 

필자는 초기에 학생들이 휴대전화를 소지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았으나 나중에는 이것이 대세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필자가 담임했던 학생 중에 가정 형편이 어려운 데 핸드폰을 소지하고 있는 녀석이 있었다.

문제는 급식비를 내지 않는 것이었다. 녀석은 나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새천년이 되면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휴대폰을 소지하게 되었다.

이는 수업시간에 몰래 핸드폰을 사용하느라 수업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부작용을 초래하였다.

학교에서는 등교시 핸드폰을 걷어서 담임이 보관하였다가 하교때 돌려주는 방법을 쓰기도 하였다. 

완력이 강하거나 일진에 해당하는 학생이 약한 학생의 핸드폰으로 서비스를 이용하고 요금을 부담하게 하는 학교폭력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도 이런 사안이 발생해서 피해 학생의 학부모가 도교육청 게시판에 피해 사실을 올리고 신문에까지 보도되어 교육청에서 조사를 나오는 일을 겪기도 하였다.

 

마지막 근무지였던 홍천 서석에서 근무할 때였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소지한 핸드폰을 강제로 거두지는 않았지만 수업시간에 사용을 하다가 적발되면 압류하여 두었다가 돌려주었다.

부전공으로 한문을 가르치던 필자는 수업시간에 핸드폰을 사용하다가 적발되면 명심보감에 나오는 문장을 외워쓰면 압류했던 핸드폰을 돌려주는 원칙을 세웠다.

과제로 부과된 명심보감의 문장을 외워쓰지 못하면 며칠간을 압류되게 되었다.

더러는 문장을 외우는 것을 포기하고 최대 4일간 핸드폰을  압류당했다 찾아가기도 하였다. 

이 방법은 확실히 효과가 있어 필자의 수업시간에 핸드폰을 사용하다가 적발되는 경우가 획기적으로 감소하였다.

 

스마트폰의 기능은 단순히 음성 통화만을 하는 전화기의 기능에서 문자를 보내고 이미지를 보내고 사진을 촬영하는 카메라 기능에 동영상을 보내고 게임을 할 수 있는 등 여러가지 기능이 추가되며 전화기 이상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인터넷과 카톡 밴드 페이스북 등 SNS 기능을 수행하도록 발전하여 갔다.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버스 기차 항공기 등의 예약을 하고 전자 상거래를 할 수 있고 은행 금융거래를 할 수 있는 등  다양한 기능이 추가되어 가고 있다.

또 검색어를 입력하여 검색하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사전의 역할을 수행하는 등 스마트폰의 기능은 과거 단순히 원거리 간의 의사소통 시간을 단축하는 기능에서 다양한 다기능을 가진 기기로 발전하였다. 

앞으로 얼마나 더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며 발전하여 갈지 예측을 하기가 어렵다.  

이제 핸드폰은 우리의 생활에서 분리할 수 없는 기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