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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행사에 대한 추억

시골 훈장 2018. 12. 25. 23:19

성탄절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기독교인에게만 국한된 명절만이 아닌 모두의 명절로 인식되고 있다.

기독교인이 다수인 나라뿐 아니라 북한과 같이 종교를 탄압하거나 일부 근본주의 이슬람 국가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성탄절을 경축일로 지키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기독교가 전파된 19세기 말부터 교회를 중심으로 성탄절이 경축일로 지켜졌다.

하나님의 외아들인 예수그리스도가 양이나 소가 머무는 외양간에서 태어나 말구유에 누이셨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예수님 탄생의 이야기다.

온 인류의 구세주인 예수의 탄생은 낮은 곳에서 시작되고 있다.


교회에서의 행사는 장년부의 경우 성탄절 축하 예배와 성가대의 특별한 공연이 중심이지만

어린이들은 크리스마스 캐럴 부르기와 율동 성극 등을 어른들 앞에서 공연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성탄절 행사의 중심은 어린이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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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어려서 교회에 다니지 않았고,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교회와 이웃하여 살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고 성장하였다.

초등학교 3학년때 양구로 이사를 왔을 때 처음으로 교회가 보이는 곳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3학년때 담임 선생님이 교회를 다니는 분이어서 많은 아이들이 선생님이 다니시는 교회에 출석했다.

방학 전 선생님은 크리스마스 노래를 가르쳐 주셨다.

"탄일종이 땡땡땡 은은하게 들립니다..." "눈 내리는 겨울 밤 감람나무 숲속에...."라는

노래의 첫 소절이 6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교회에 다니는 찬구들이 있어 교회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으나 집에서 교회에 가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친구 따라

교회에 가지는 않았다.

같이 몰려 다니는 또래들과 같이 초가로 된 시골교회의 종각의 종을 치며 장난을 치다가 교회를 지키시던

할머니에게 꾸중을 듣고 달아났던 기억이 어린 시절 교회에 대한 기억의 전부다.

3학년 가을 어느날 양복을 단정하게 입고 넥타이를 맨 젊은 청년이 우리집을 방문하여 교회에 다닐 것을 권하였으나

어머니가 좋은 말로 거절하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그러나 산타할아버지가 착한 어린이에게만 선물을 준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 맡에 선물이 놓여 있었다.

부모님이 산타할아버지였다는 것을 안 것은 그 후의 일이다.

필자가 살던 양구 시골에서 교회에서 하는 어린이들의 성탄절 축하 공연은 마을의 행사였다.

교회에 나가시지 않던 어머니도 그날은 동네 사람들과 같이 어린이들의 공연을 보러 교회에 가셨다.

그러나 필자는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가지 않았다. 멀리서 애들이 발표를 하는 소리를 듣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성탄절 새벽 우리집 마당에서 노래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밖에서 노래를 부른 교우들에게 준비한 과자를 주셨다.

이것이 필자가 경험한 첫 새벽송에 대한 기억이다.


그후 가오작리를 떠나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가며 교회와 멀어지게 되었다.

이웃 마을에 교회가 있었지만 가까운 친구들 중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이 없었고 부모님도 교회를 다니시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중학교때 외가 친척의 영향으로 기독계 이단으로 규정된 교회에 나간 적이 있다.

이것이 굴절된 모습이지만 기독교와의 첫 접촉이라고 할 수 있다.

고등학교때도 몇번 나가 보았지만 진학을 포기하고 교회에 헌신하라는 말과 개인숭배에 대한 거부감이 생겨서

발을 끊었다.

고교시절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친구들이 교회에 가자고 권하기도 했지만 궤변으로 기독교의 난해한 교리를 공격하며

교회에 나가는 것을 거절하였다.


대입에 실패를 하고 깊은 절망상태에 빠져 있을 때였다.

같은 반 친구였던 김철해와 같이 공원에서 오랜 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하단에서 설명>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와의 대화는 나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재수를 했지만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고 지방 국립대로 진학하게 되었다.

서울로 가겠다는 꿈이 컸던만큼 실망도 컸다.

그때 하나님께 의지하고 싶은 열망이 생겨났고 교회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같은 과에 다니는 친구에게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고 물어보고 그가 다니는 교회에 스스로 나갔다.

그때가 대학 1학년 때인 5월이었다.

이때부터 거의 빠지지 않고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였다.

교회에 출석한지 두달도 못되어 선배의 권유로 무슨 강습회에 갔는 데 여름성경학교 교사 강습회였다.

교회에 인적 자원이 부족하던 때라 여름성경학교 보조 교사를 맡게 되었다.

여름성경학교가 끝나고 어린이들이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러 나왔다가 선배에게 붙잡혀서

교회학교 교사의 직분을 수행하게 되었다.


다음 해에 집 가까이에 설립된 소양댐 수몰지구에서 이전해 오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수몰지구 보상을 받아 건물을 이전하고 내평리에서 그 교회에 다니던 몇 가정과 교역자만 따라나온 교회라

신설교회와 마찬가지였다.

필자와 같은 교회에서 간 인종이와 이웃에 사는 후배 태완이와 삼총사가 되어 신설교회의 교회학교와 중고등부, 청년부의

창설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특별한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없던 시절 교회는 어린이들에게 놀이의 장이고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소였다.

감당할 수 없을만큼 많은 아이들이 교회로 몰려왔다.

1970년 성탄절 행사를 치렀다.

동역하는 주일학교 교사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짜고 연습을 시켜 어린이들의 성탄절 발표를 할 수 있었다.

중고등학생들은 이른 바 올나이트(All night)라는 것을 했다.

교회에서 밤을 새며 노래를 부르고 오락을 하고 떠들며 놀았다.

새벽에는 새벽송을 돌았다.

역사가 짦은 신설교회라 어른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중고등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몇몇 청년들과 집을 안내할

어른들이 조를 짜서 새벽송을 돌았다.

교우들의 가정에서는 온 집안에 불을 모두 켜고 기다리고 있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저들 밖에 한 밤 중에', '기쁘다 구주 오셨네' 등의 크리스마스 찬송이 끝나고

"성탄과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라는 인사가 끝나면 준비했던 선물 꾸러미를 주셨다.

이 선물들은 성탄 예배후 어린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간식이 되었다.

애들은 성탄절 날 과자 등의 선물을 받는 재미에 교회로 몰려왔다.


해마다 성탄절이면 연례 행사로 성탄전야에 어린이들의 공연이 행해졌고, 중고등부와 청년들의 크리스마스 이브

밤샘 행사가 행해졌다.

그러다가 교사로 근무하게 되어 시골로 나간 후에는 시골 교회에서 성탄절을 보내게 되었다.

기억에 특별히 남는 것은 횡성 갑천에서 근무할 때다.

시골 교회라 멀리 떨어진 곳에서 교회에 출석하는 교우들이 많았다.

'70년대 후반 - '80년대 초반에 시골에는 승용차를 소유한 가정이 없었고 교회에도 차량이 없었기 때문에 교회에 오려면

걸어서 오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큰 고개를 넘어 2시간 가까이 걸어서 교회에 나오는 분들도 있었다.

시골교회의 성탄 행사는 마을의 축제와 같았다.

평소 교회에 나오지 않던 이웃 주민들도 어린이들이 발표하는 모습을 보러 교회로 왔다.

이 때에는 필자의 아들도 순서 하나를 맡았는 데 마음이 무척 흐뭇했었다.


성탄절 노래를 부르는 필자의 아들, 마이크를 잡고 있는 분은 어린이들을 지도하던 백집사


예배와 발표회가 끝나고 나면 청년들과 학생들은 교회에 남아 밤샘 행사를 했다.

어른들은 새벽에 모여 간략한 예배를 드리고 청년 학생들과 같이 새벽송을 돌았다.

교회에서 가끼운 곳은 주로 연장자들 중심으로 교우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새벽송을 돌고

학생과 청년들은 먼 곳에 있는 교우들의 가정을 방문하며 새벽송을 돌았다.

당시 필자는 30세 전후의 젊은 시절이었기 때문에 먼 곳으로 배정되었다.

신작로를 따라 좀 걷다가 산골길로 들어선다.

작은 언덕을 넘거나 개울을 건너 드문드문 몇집씩 마을이 산재하여 있다.

교우들은 이런 곳에 흩어져 살기 때문에 몇개의 팀으로 나누어 원거리에 거주하는 가정까지 모두 방문하였다.

추위와 싸워 가며 때로는 얼어붙은 언덕길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징검다리를 딛고 개울을 건너기도 하였다.

외딴 집에 도착하면 그곳에 사는 교우는 온 집안에 불을 밝혀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대문 안에 들어서서 크리스마스 찬송을 몇곡을 불렀다.

찬송이 끝나면 집안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온돌이 달아 앉기가 어려울 정도로 불을 때고 기다렸다.

교우들은 새벽송을 돌러 온 우리들에게 뜨거운 떡국이나 만두국 등을 대접하였다.

나올 때면 큰 선물 꾸러미를 주었다.

주로 고등학생들이 선물자루를 지고 따라다녔다.

몇 가정을 도는 데 2시간 가까이 걸렸다.

때로는 한 집을 방문하기 위해 20-30분을 걸어가기도 하였다.

돌아올 때면 날이 밝았다.

추운 날 새벽에 다녔어도 춥거나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성탄절에는 온 교우들이 모여 축하 예배를 드렸다.

예배가 끝나면 점심식사가 있었다.

지금은 많은 교회에서 주일 낮예배후 점심식사를 하지만 당시에는 교회에서 식사를 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성탄절 점심식사에 대하여 기억나는 이야기(에피소드)가 있다.

위의 사진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는 백집사네 집에 도사라고 하는 큰 도사견이 한마리 있었다.

이 개는 주인을 따라 교회를 오가곤 했다.

어느 해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성탄절 점심식사에 쓰려고 원주에 가서 소고기를 구입하여 왔다.

(당시 이곳은 면소재지였지만 정육점이 없었다)

미리 고기를 삶아 국물을 우려내고 고기는 건져서 목사님 댁 아궁이에 있는 솥에다가 넣어 두었다.

다음날 국을 배식할 때 고기를 찢어서 넣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백집사네 도사가 교회부근을 배회하다가 고기냄새를 맡고 목사님 댁 부엌에 들어갔다.

입으로 솥뚜껑을 열고 100여명이 먹으려고 준비했던 삶은 소고기를 몽땅 먹어 버렸다.

다음 날 음식을 준비하던 분들 사이에서는 소동이 벌어졌다.

차편이 마땅치 않으니 원주에 가서 사올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고기가 빠진 무만 넣은 고기 국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몇몇은 백집사에게 도사를 잡자고 농을 건너기도 하였다.


횡성 갑천에서 5년을 근무하고 탄광지대를 거쳐 춘천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교회에서 다양한 성탄절 행사가 행해졌다.

새벽송의 경우 도시에서는 민폐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아파트로 주거환경이 바뀌고 주민들이 춣석하는 교회가 다양하다 보니 새벽송을 도는 팀들이 마주치는 경우가 많았다.

새벽송 팀끼리야 만나서 반갑게 인사를 하고 스쳐 지나가면 되지만 주민들이 입장에서는 불편한 분들이 많았다.

한 통로에 교회에 다니는 가정이 여럿 있는 경우 각 교회별로 새벽송을 돈다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주민의 입장에서는

새벽잠을 깨는 불편함을 견뎌야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점점 새벽송을 돌지 않는 교회가 늘어났고,

새천년에 들어서서는 도시교회에서 새벽송을 도는 경우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교회의 종소리도 비슷한 경로를 겪었다.

시골에 살 때 교회 종소리는 마음을 깨우는 마음 속에 무언가를 전달하여 주는 소리였다.

금속이나 산소 통 등으로 만든 종을 치다가 차밈벨로 바뀐 것이 '70년대 초였다.

차밍벨을 사용하는 교회가 적을 때에는 새벽에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을 하기도 하고, 찬송가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기능이 있었다.

그러나 밀집한 도시 교회에서 제각각 울려퍼지는 차밍벨 소리는 소음공해로 인식되게 되어 이 소리 역시

'90년대에 들어오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거리의 성탄절 모습도 변했다.

예전에는 대부분의 상점이 크리스마스 트리로 장식을 하고 거리에는 캐롤이 울려펴졌다.

들뜬 젊은이들 때문에 퇴폐 현상이 일어나기도 해서 성탄절을 경건하게 보내자는 캠페인이 행해질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는 성탄절의 북적임도 사라지고 거리에서 캐롤송 소리도 듣기 어렵게 되었다.

한마디로 성탄절 분위기가 거리에서 거의 실종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교회에서도 새벽송이 폐지되고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샘 문화도 거의 사라졌다.

방송에서 방영하던 성탄절 특집도 기독교 방송을 제외한 일반 방송에서는 거의 사라졌다.


이제 12월이 되면서부터 거리에서 흥청거리던 성탄절 분위기가 가라앉아 버리고 흥청거리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새벅에 교우들의 가정을 돌며 부르던 성탄절 새벽송은 이를 경험한 세대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추억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