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 마을 사람들 이야기 - 초등 3학년 수매의 임기응변 순발력
"고인돌 마을 사람들 이야기"는 강원도 양구군 동면 지석리의 괸돌이라는 마을의 '60년대 초의 이야기다.
필자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 초까지 만 3년간 고인돌 마을에서 살았다.
할머니와 셋째 며느리던 어머니는 고부간의 사이가 아주 좋으셨다.
어머니는 마을에서 일어나는 시시콜콜한 일들까지 할머니에게 이야기해 드렸다.
나는 어머니가 할머니께 해드리던 이야기를 흥미를 가지고 들었고 그때 들은 이야기들이 50년이 지난 지금 기억의 창고속에서 먼지를 털고 나와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사건과 기억에도 한계가 있어 더 쓸 소재가 거의 바닥났다.
같은 마을에 살던 유일한 초등학교 동기인 방상옥군에게 더 이야기를 들어 이야기의 소재로 삼으려 했는 데
만나려고 했던 방학을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안타깝게도 이야기 소재를 구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초등학교 몇년 후배가 마을에 살고 있고,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당시 고등학생이던 동네 누님이 마을에 살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분들을 만나면 이야기거리가 더 생기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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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두 학년쯤 밑인 수매는 우리집에서 도랑을 건너 산밑에 살았다.
수매의 동생이 다섯인가 되었는 데 수매가 맏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수매네는 갖난아기 동생부터 수매까지 그마그마한 애들이 좁은 집안에서 몸을 부대끼며 사는 전형적인 당시 농가의 삶의 모습이었다.
수매 아버지는 아마 30대 후반쯤 되었을 것이라고 기억되는 데 삶에 찌들어서인지 훨씬 나이가 들어 보였다.
수매 어머니는 전형적인 농촌 아낙네의 모습이었는 데 살림이 어려워 수매 부모님과 아이들의 옷차림은 늘 남루하였다.
당시 남자아이들의 대부분의 모습이 그러했듯이 수매도 박박머리 삭발이었는 데 때국이 흐르는 남루한 옷차림이었다.
당시 농촌의 가옥들처럼 수매네 집도 초가집이었고 변소는 마당 건너에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변소는 바닥에 긴 구덩이를 파고 넙적한 돌 두개를 놓아둔 모습이었다.
변소 한구석에는 아궁이에서 나무를 때고 나온 재를 쌓아두는 공간이 있었다.
소변은 재에 직접 누었고, 큰 것을 보면 나중에 어른들이 부삽으로 변을 퍼서 재와 섞었다.
이렇게 대소변과 재가 섞인 것은 다음해에 거름이 되어 밭으로 반출되었다.
1961년 겨울로 기억된다.
수매네 변소에서 새벽에 불이 났다.
아마 수매 부모님이 꺼지지 않은 불씨가 있는 줄을 모르고 아궁이에서 재를 퍼다가 변소 잿더미에 버린 것이 불씨가 살아나서
짚으로 엉성하게 지은 변소를 태운 모양이다.
다행히 불은 변소만 태우고 진화가 되었다.
수매와 동생들은 불이 난 소동을 몰랐거나 알았다고 해도 아직 아침이 되기 전이기 때문에 깨었다가 다시 잠이 들었을 것이다.
수매네 변소에 불이 난 것이 수매네만의 피해로 끝나지 않았던 것이 문제가 되었다.
군인들이 훈련을 나와 통신선을 가설했는 데 하필이면 통신선이 수매네 변소 지붕위를 지나간 것이 문제가 되었다.
당연히 변소에 불이 났을 때 통신선도 타버려 전화가 불통이 되었을 것이다.
군부대에서는 불통의 원인을 조사했을 것이고 수매네 변소가 타면서 통신선이 불통이 된 원인을 찾아내었을 것이다.
군 헌병대에서 조사를 나왔다고 한다.
수매 부모를 불러 원인을 물었더니 부모님은 수매가 아궁이의 재를 갖다 버렸는 데 그 재에서 발화가 되었다고 둘러댔다고 한다.
조사나온 헌병들은 잠을 자는 수매를 깨워 네가 재를 버렸냐고 물었는 데 수매는 자신이 재를 버렸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어이가 없는 쪽은 조사나온 군인들이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갖다 버린 재에서 불이 난 것인데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으니 군인들은 그대로 돌아갔다고 한다.
동네 어른들은 수매의 임기응변과 순발력을 칭찬하였다.
수매가 헌병들이 무서워서 자신이 벌린 일이 아니라고 했으면 수매 부모님이 조사를 받았을 것이고 그때문에 번거로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수매 부모님 중 한분이 불씨가 포함된 재를 변소에 버린 것이 원인이 되어 불이 나 변소를 태웠는 데 부모님과 사전에 입을 맞추지 않았는 데 수매가 임기응변으로 자신이 했다고 대답을 해서 부모님을 곤경에 처하지 않게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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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매네는 가난했는 데 애들이 많아 생활이 어려웠다.
5.16이 나고 들어선 당시 군사정부는 가족계획 사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연 3%에 육박하는 인구증가율을 낮추기 위해 전국민을 대상으로 가족계획 홍보를 실시히였다.
고인돌 마을에도 가족계획 포스터가 붙고 강사가 와서 마을 어른들을 모아놓고 홍보를 하였다.
호기심이 생겨 무슨 이야기인가 들으러 갔는 데 애들은 모두 내쫒고 어른들만을 대상으로 교육을 시켰다.
아마 피임법 같은 것을 가르치지 않았나 생각된다.
가족계획 홍보가 시작되고 얼마 안되었을 때 일이라고 하였다.
가족계획 홍보요원이 마을을 찾아와서 애들을 적게 낳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역설했다고 한다.
강사가 한창 이야기를 할 때 수매 아버지가 일어나서 반론을 폈다고 한다.
"없는 놈이 자식이라도 많아야 나중에 이놈이 벌어 오고 저놈이 벌어 오고 해서 살 수 있지 자식들이 없으면 어느 놈이 돈을 벌어다가 주느냐고? 없는 놈은 자식도 낳지 말라는 말이냐?"라고 하면서 강사에게 "또 그런 소리를 지꺼리면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 버리겠다"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혼비백산한 가족계획 홍보요원은 자전거를 타고 내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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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로부터 반세기가 더 흘렀다.
인구증가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시대에서 인구 감소로 고심을 하는 시대가 되었다.
지금 젊은이들은 아이를 적게 낳거나 아예 낳지를 않는다.
멀리 가기 전에 조카들과 친구의 친구의 자식들을 보면 이런 현실을 실감할 수 있다.
나이가 40을 넘었거나 40에 가까운데도 결혼을 하지 않은 사례가 수두룩하다.
결혼을 하였어도 무자녀를 선언하고 낳지를 않거나, 낳을 계획은 있으나 결혼 몇년이 지나도 임신을 하지 못해 고심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未婚, 非婚, 난임(難姙), 不姙이 흔한 예가 되었다.
인구가 국력이라고 하는 데 대한민국은 이제 출산율 저하로 미래의 세대가 감소되면서 서서히 활력을 잃어 가고 있다.
당장 아동용품 산업이 타격을 받고 있고, 교육관련 산업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교사의 채용이 줄어들고 있고 유아교육 기관들과 산부인과 소아과 관련 의료기관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
산부인과 병원이 없어 타시군에 가서 출산을 해야 하는 곳이 많다고 한다.
자녀를 양육하는 데 고비용이 들고, 양육을 해도 자식에게서 받을 반대급부를 기대하기가 어렵고 계속 부담만 지는 현실 때문에 자식 낳기를 기피하고 있다.
여성들도 사회에 진출해서 남자들과 경쟁하여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쟁취한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지만
출산과 육아로 경력이 단절되고 승진 등 경쟁에서 밀리며 일에 지장이 있게 되니 출산을 미루거나 기피하게 된다.
출산과 육아에서 해방되면 당사자는 시간과 삶의 질에서 이득을 볼 수 있어 개인적으로는 득이 되지만 공동체에게는 지속적인 존속을 위태롭게 하는 부정적인 과를 초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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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든지 완전한 황금시대는 없다.
그 시대가 공통적으로 겪는 어려움이 있고,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있다.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지나놓고 보면 과오가 되는 경우들도 있다.
'6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 전개되었던 가족계획 사업도 그런 것들 중의 하나는 아닐까?
골목마다 애들이 넘쳐나고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로 요란했던 그 시대가 더 좋은 시대였을까?
아니면 골목에서 아이들이 사라지고, 마을에서 아이들이 사라진 시골의 모습이 더 나은 시대일까?
먹고 살기는 힘들었지만 마을이라는 지역공동체가 존재했던 그 시절보다
물질적인 삶은 풍성해졌지만 지역공동체가 사라지고 가족공동체마저 해체의 위기를 겪고 있는 현재가 더 나은 시대일까?
해방후 70년간의 변화가 과연 발전만 있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근대에 우리가 극복한 어려움도 많고, 성취한 것도 많지만 잃어 버린 것들 역시 많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