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추도식 추도사
아래는 어머니의 21주기 추도식(2015년 7월 11일)의 추도사입니다.
오늘 어머니의 21주기 추도식을 맞이하여 동생들과 저의 가족들이 모였습니다.
어머니의 추도일을 맞이하여 어머니의 생전의 삶의 모습을 되돌아 보며 어머니가 보여주신 삶의 모범과 교훈을 생각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는 1924년 2월 25일 강원도 양구군 남면 구암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2남 4녀 중 차녀로 태어나셨습니다. 어려서부터 일을 찾아서 하는 성격으로 부지런하셨다고 합니다.
일제말 1940년경 어머니의 친척이 거주하는 개성에 가셔서 인삼 가공 공장에서 일을 하신 적이 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말씀에는 공장 안에서 인삼을 먹는 것은 가능하지만 밖으로 반출을 하면 안되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남자 못지 않게 힘이 세셨던 것은 젊은 시절 인삼을 많이 잡수셨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개성에 계시다가 사창리 친척집에 머무셨는 데 그곳에서 아버지를 만나 1944년에 결혼하셨다고 합니다.
해방이 되고 38이북이던 사내면에서 춘천으로 이주하셨다가 1946년부터 아버지가 평창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셨기 때문에 평창으로 이주하셨습니다.
평창 초등학교에서 잠시 근무하시다가 미탄 초등학교로 가셨는 데 이곳에서 영월 마차가 가까웠습니다.
당시 교사들에게 봉급이 제때 지급되지 않아 방학때에는 영월 마차 탄광에 가서 사택의 도배를 하는 일을 하시기도 했다고 합니다.
1947년 창현이라는 누나가 태어났으나 어려서 잃었다고 합니다.
1950년 5월에 내가 태어났고 이어 한달이 조금 더 되어 6.25 사변이 일어나고
어머니는 어린 나를 업지도 못하고 안고서 대구 아래 경산까지 걸어서 피난을 가셨다고 합니다.
전쟁 중이라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우리집에 오셔 계시다가 전쟁을 만나 함께 피난을 가셨다고 합니다.
국군이 북진을 함에 따라 다시 평창으로 오셨다가 1.4후퇴때는 안동까지 피난을 가셨다고 합니다. 이때는 할머니도 함께 피난을 하셨다고 합니다.
전선이 다시 북상함에 따라 피난에서 돌아오셨고 그뒤 평창 지역의 몇 학교를 거쳐서 속초로 가게 됩니다.
평창에서 두 여동생이 태어났습니다.
숙현이가 태어나던 날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동생이 태어나자 밑의 여동생과 둘이서 손을 잡고 좋다고 방안을 빙빙 돌던 기억이 납니다.
1956년 3월말 속초로 이사를 했습니다.
속초에 엄청난 눈이 내렸던 기억이 납니다.
두 여동생이 홍역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던 기억이 납니다.
병원에 간다는 것과 치료약을 쓴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고 문을 닫고 이불에 싸놓와 바깥 바람과 차단하는 것이 치료방법이었습니다. 아버지와 같이 야산에 가서 산토끼똥을 줏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산토끼똥이 민간요법으로 약이었던 것 같습니다.
1주일을 식음을 전폐하고 앓던 두 동생이 기적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속초에서 주현이가 태어났습니다.
큰어머니가 산바라지를 하러 오셨다가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는 데 전보가 잘못 와서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되어 아버지가 사돈댁 장사에 다녀오시고 정작 큰어머니는 친정어머니의 장례식에 가시지 못한 해프닝이 벌어졌습니다.
전화도 없고 교통이 불편하던 당시라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현이가 태어난 날은 양력으로 4월 11일이었는 데 눈이 내렸습니다.
집에 오는 데 어느 여선생님이 동생이 “형님, 형님”하면서 운다고 했습니다.
양구에서 순자 누님이 오셔서 동생들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2학년 2학기때인 10월에 속초에서 양양군 현북면 장리라는 곳의 장리분교로 아버지가 전근을 가시게 되었습니다.
차편이 없어서 산판 트럭(아마 제무시로 기억됨)을 타고 현북면으로 갔습니다.
캄캄한 밤에 도착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전교생이 50명 정도의 분교로 6학년은 본교로 가고 1-5학년이 두분의 선생님에게서 공부를 했습니다.
구걸을 온 거지에게 어머니가 쌀을 주셨는 데 다음해 5월 말쯤 어떤 땅꾼이 뱀을 넣은 자루를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어려울 때 어머니가 쌀을 주셔서 고맙다고 하며 비싼 능구렁이 한 마리를 거저 주겠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돈을 주려 하고 땅꾼은 안받으려 하고 한참 싱갱이를 벌리다가 얼마간의 돈을 지불하고 능구렁이를 넘겨 받아 아버지의 약으로 썼습니다.
아버지는 허리가 아프셔서 지네를 넣은 닭 등으로 약을 했는 데 능구렁이를 약으로 쓴 후에는 허리가 아파서 고생하시지 않았습니다.
6월 아버지가 양구 광덕초등학교로 전근되며 양구로 이사를 오게 됩니다.
처음에는 가오작리라는 마을에서 거주했습니다.
이때 세현이가 태어났습니다.
동생들이 태어나고 아버지의 박봉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서 구멍가게라도 운영하려는 계획으로 조금 떨어진 적리라는 부대 후문 앞의 마을로 이사를 해서 구멍 가게를 운영했습니다. 그러나 가게가 잘 되지 않았고 아버지가 임당국민학교로 전근이 되시면서 지석리 괸돌마을로 이사를 합니다.
이때가 4.19혁명이 나던 1960년입니다.
‘60년 아버지가 구암리의 논을 팔고 빚을 내어 개울가에 논을 개간하고 큰댁이 이사를 오셔서 농사를 지으셨으나 큰아버지는 ’62년 김화로 이사를 가셨습니다.
큰댁이 이사를 오시고 다음해인 ‘61년부터 부터 할머니가 우리집에 오셔 계시게 됩니다.
아버지는 고성군 대진국민학교로 전근을 가시게 되고 어머니 혼자서 우리들을 돌보셨습니다. 구멍가게를 했고, 솜틀을 인수받아 솜을 틀어 주기도 했습니다.
1961년 앞서 세상을 떠난 금현이가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가을에는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해오시고, 고객이 오면 동생을 업고 먼지가 나는 솜을 틀어주고, 할머니를 모시는 일을 했습니다.
고성으로 가셨던 아버지가 1961년 가을에 원당국민학교로 전근을 오셔서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가게가 그런대로 되었지만 임씨라는 분이 들어와서 가게를 열며 우리 가게는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1963년 1월 혹한에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이해 4월 아버지가 도촌초등학교로 전근이 되시면서 창리 마산 마을로 이사를 합니다.
이곳에서 생활은 아주 어려웠습니다.
어머니는 양구읍에까지 다라를 이고 걸어가셔서 비지를 사다가 밀가루와 섞어서 저녁에는 이를 구운 반데기로 때우기도 하고 수제비국이나 칼국수 등 밀가루 음식으로 끼니를 대체했습니다.
1965년 내가 춘천으로 고등학교를 진학하겠다고 강하게 주장하자 어머니는 큰 결심을 하십니다.
4월 춘천으로 이사를 합니다.
아버지가 퇴직을 하시면서 당시 돈으로 10만원(아랫집의 땅 한평에 200원할 때)을 조금 더 받으셨는 데 큰아버지가 사시던 집을 사서 수리를 하고 남은 돈 10만원을 친척에게 꾸어주었다가 떼이게 됩니다.
몇 달 후 아버지는 다시 복직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1970년 아버지가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복직후 5년도 안되어 돌아가셨기 때문에 퇴직금도 얼마 안되고 연금 해당도 되지않아 어머니는 자식들을 먹이고 가르치기 위해 무척 고생을 하셨습니다.
그후의 부모님의 삶은 다음 기회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는 평생 자식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잡숫는 것과 입는 것을 희생하시며 자식을 위해 전력을 기우리셨습니다.
그러면서 5남매를 키우셨습니다.
우리의 오늘이 있는 것은 어머니의 희생의 바탕위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늘 내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거나 불화하시는 모습을 우리가 거의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또 어머니와 할머니가 다투는 모습을 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아주 사이가 좋으셨습니다.
어머니는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할머니에게 말씀 드렸습니다.
그때 들었던 일화들이 나의 블로그 “고인돌 마을 사람들 이야기”에 씌여 있습니다.
또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아내와 어머니가 다투는 일을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고부간의 소소한 갈등이 아주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갈등이 커지고 표면화되거나 장기화된 적은 없었고 이 때문에 내가 심리적 어려움을 겪은 일이 없습니다.
이 두가지는 내 자식들에게 친족들에게 누구에게도 자랑합니다.
또 어머니는 이웃에게서도 신망이 크셨습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이웃에게 돈을 빌리려고 하면 돈이 있는 한 빌려 주었습니다.
덕분에 우리가 교납금이 밀리지 않고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친척들 사이에 화목하셨습니다.
큰고모댁의 생활이 어려우셨는 데 우리도 어려웠지만 고모님을 도와드리는 모습을 여러번 보았습니다. 또 특별한 음식을 하면 큰어머니를 생각하셨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이러한 어머니의 부지런하고 자식을 위해 헌신하시고 친척들과 화목하는 모습을 보고 컸습니다.
이러한 어머니의 삶의 모습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닮아가기 위해 노력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