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대학입학 자격 예비고사, 수학능력 시험과 대학입시 변천

시골 훈장 2014. 11. 13. 20:24

오늘이(2014. 11. 13)이 수학능력시험일이다.

오늘도 예의 입시 한파가 닥쳤다.

수학능력 시험 실시의 뉴스를 보면서 예전에 대학입학 자격 예비고사를 보던 생각이 났다.

필자의 자식들도 수능을 거쳐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입시는 대를 이어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큰 짐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입시제도는 수십번 바뀌었다고 비판을 받고 있다. 근대교육이 시작된 일제때부터 수능이 실시될 때까지 입시제도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고찰하고 필자가 치른 예비고사에 대한 경험을 써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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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은 입시 경쟁이 치열하고 입시 결과에 따라 한 개인의 일생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본인은 물론 가정과 학교의 초미의 관심사는 대학입시다.

50-60대와 그 이상의 세대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도 공부를 잘하면 좋은 대학을 진학하거나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시험을 통해 상위 계층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과거를 통해 입신양명할 수 있었다.

오늘날 과거에 해당하는 것은 대학입시와(조선시대의 생원, 진사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고시(사법, 행정 등 임용시험)와 일류 기업 입사시험, 명문대 박사과정 입학 등은 大科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대학에 입학해야 출세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으니 대입에 명운을 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수학능력시험은(수시 등 합격자를 제외하고)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1차 관문 역할을 한다.

수능성적에 따라 대학과 학과가 달라지게 된다.

좋은 성적을 획득하면 그만큼 선택의 기회가 넓어지게 되고 가고 싶은 대학과 학과로 진학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근대교육이 시작된 이래 헤아릴 수 없을만큼 입시제도가 변화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각 사립 전문학교(보성, 연희 등)는 학교 자율로 입학시험을 치러 학생을 선발하였으나 경성제대나 관립학교는 일본 문부성이 주관하여 치렀다고 한다. 경성제대에 조선 학생이 합격하는 것이 어려웠는 데 이는 국어(일어) 역사(일본사)시험이 조선인 학생에게는 불리한 데서 오는 원인이 컸다고 한다(일제의 편파적인 선발방법도 문제가 되었다)

이때도 재수생 문제가 있었고 1944년에 경성제대에서는 오늘날 내신제에 해당하는 학교장 조사서와 실적 등으로 무시험 선발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경성제대의 경쟁율은 첫해인 1924년에 4:1, 1942년에는 11:1에 달했으며 조선인의 비율은 해에 따라 다르나 적은 해에는 20%정도고 많은 해에는 35%선이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 학생이 대학(전문학교)에 가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는 일제가 의도적으로 우민화 정책을 써서 조선인들이 교육을 받는 것을 억제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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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일제의 질곡으로부터 해방된 후에도 입시제도는 수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광복후부터 1953년까지 대학입시는 문교부가 시험기일이나 일부 입시과목을 정해주되 시험과목의 결정과 출제와 선발 방법은 대학

자율로 시행하였다.

이때도 입시경쟁은 치열해 국립대학은 3:1, 1950년 연세대는 8:1의 경쟁율을 보였다고 한다.

대입에서 부정도 심했는 데 1948년에는 100여명의 대리 시험자가 적발되었고, 권력이나 금권을 통한 부정입학 사례도 있어 이를 철두철미하게 감시하겠다는 내용의 기사가 동아일보에 보도되기도 했다.(1949년 6월 20일)

전시에도 대학입시는 치러졌으며 이는 뜨거운 향학열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입시를 공정하게 관리한다는 것을 목표로 1953년에 대학입학 연합고시가 치러졌으며 이 시험에 합격하여야 대학입학 자격이 주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공정성에 대한 논란이 있어 시험이 백지화가 되고 각 대학에서 자율적으로 학생을 선발하도록 하였다.

전기 대학 경쟁율은 5:1 정도로 높게 나타났다고 한다.

1955년에는 각 대학이 자체 규정에 의해 시험을 치르고 학생을 선발하였다.

1956년에는 연희대(지금의 연세대)가 무시험 전형을 실시하였고 이화여대와 중앙대도 일부 학생을 무시험 선발하였다고 한다.

1957년 문교부는 전국 대학 총학장 회의를 열고 입학정원의 10%는 무시험 전형으로 나머지는 내신 30%와 입학성적 70%로 선발하도록 하였으나 서울대는 이에 반발하고 전원 필기고사 성적으로 선발하였다고 한다(조선일보, 1957년 9월18일자).

내신서의 위조로 20여명의 합격이 취소되고 교장이 처벌받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대학들은 자체 규정에 따라 입시를 실시하여 1961년까지 유시험, 유시험과 무시험의 병용, 무시험 등으로 전형방법이 달랐다.

이때 문교부의 영향력은 크지 않아 시험날짜를 지키지 않거나 정원을 초과해서 선발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5.16으로 군사정권이 들어 서고 문교부는 국가고사 실시 계획을 발표하였다.

일반대학의 합격선은 300점 만점에 150점 이상으로 정했는 데 서울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대학이 정원에 미달되는 등 문제점이 발생하여 제도에 대한 비판이 대두되었다.

1963학년도에는 1962학년도에 제기된 문제점을 보완하여 실시하였는 데 국가고사가 대학입학을 위한 자격고사로만 활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대학에 따라서는 문교부가 제시한 필수과목을 반영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여러 대학에서 미달사태가 발생하여 2차 전형에서는 합격선을 낮추고 야간대나 교육대, 초급대에는 불합격자도 응시하도록 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또 문제가 틀리거나 모범 답안이 틀려 이를 수정하는 등 시험 관리의 문제점도 대두되었다. (동아일보, 1963년 2월 7일자)

 

1964학년도부터 1968학년도까지는 국가고사가 없이 대학별로 시험을 치르었으며 1962학년도부터 치르어지던 체능검사는 1965학년도부터는 폐지되었다.

자격고사의 폐지로 미달사태는 줄어들었으나 정원초과 모집이 논란이 되었다.

수업료 인상이 억제되자 일부 사립대가 학교운영을 이유로 정원을 초과하여 학생을 선발하여 문교부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문교부가 1965학년도부터 입학정원의 엄수, 대학의 질적 향상 등을 이유로 자격고사를 부활하려 하였으나 비판적 여론에 직면하여 시행되지 못하였다.

 

"1969학년도에는 지난 5년 간 실시되지 않았던 국가고사가 다시 부활되었다. 문교부는 “대학 및 고교의 질을 높이고 일부 학교의 부정입학 풍조를 없애기 위해 현행 대학입시 제도를 대폭 개편, 1969학년도부터 대학입학 예비 국가고사 제도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경향신문, 1968년 10월 15일자).

이에 따라 수험생들은 예비고사에 통과한 후에 대학별 시험에 응시해야 했다.
예비고사 시험과목은 국어, 사회(일반사회, 지리, 역사), 수학1, 과학(물리, 화학, 생물), 영어, 실업·가정(농업, 공업, 수산, 상업, 가정 중 1과목, 다만 가정은 여자에 한함) 등 6개 과목이었고, 모두 객관식으로 출제되었으며 합격자는 대학 정원의 150%를, 1972학년도
에는 180%를 총점 순으로 선발하도록 했다(동아일보, 1971년 7월 20일자). 대학별 시험은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치러졌는데, 시험문제는 예비고사가 객관식인 점을 감안하여 주관식 위주로 출제되었다(동아일보, 1971년 9월 23일자).

 

문교부는 이 제도를 ‘대학 정상화’의 실마리로 보았고, 당시 권오병 문교부 장관은 “대학생의 자질향상과 사대 운영의 정상화는 물론 대학진학 인구를 사전에 조절함으로써 균형 있는 인력수급을 기할 수 있으며, 사회가 부담하는 필요 없는 교육비를 절약할
수 있다.”며 그 효력을 장담했다(동아일보, 1968년 10월 15일자).

 

이 예비고사는 시행전부터 합격자 수를 정원의 150%로 하는 것이 대학의 정원미달을 초래할 것이라는 논란을 비롯하여 대학의 자율성과 특수성을 저해한다는 등의 논란이 있었다.

예비고사가 시행된 이후에도 정원미달, 재수생 누적 등의 문제가 대두되어 예비고사의 존속과 폐지를 두고 논란이 계속되었다.

 

1973학년도부터는 예비고사 점수가 입시 총점에 반영되기 시작하였다.

합격자 비율도 늘려서 1972학년도부터는 대입정원의 180%를, 74학년도부터는 시도별 정원의 200%를 합격시켰고, 1979년부터는 전문학교가 전문대학으로 승격되면서 전문대학의 정원까지 포함하게 되어 응시자의 87.7%가 합격하여 자격고사로서의 기능이 상실되게 되었다.

1977학년도부터는 대학입시에 내신성적을 반영하는 대학이 나타나게 되었다.

1980년 국보위는 7.30 교육 개혁조치를 통하여 본고사를 폐지하고 예비고사와 내신성적만으로 학생을 선발하도록 하였다.

1980년에 실시된 1981년도 대학입학 자격 예비고사를 마지막으로 예비고사는 폐지되고 1982년부터 - 1993년에는 대학입학 학력고사가

1994학년도부터는 대학수학능력 시험이 실시되게 된다.

그 이후의 입시 변천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시 약술하기로 한다.

 

위의 입시제도 변화에 대한 자료는 교육부의 2013 정책개발 연구사업에 의한 <대입제도 개선방안 연구>에서 발췌 요약한 것입니다.

저작권 문제가 있어 지적하여 주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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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1968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따라서 대학별 고사를 치르게 되었으나 지원 대학의 입학시험에서 낙방하여 재수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대학입학 예비고사를 치르게 되었다.

재수를 하며 입시정보에 어두웠기 때문에 갑자기 발표된 예비고사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과 같았다.

대학별로 입시를 치를 때 입시 과목이 학교별로 달랐지만 국어, 영어, 수학은 공통으로(일부 수학이 제외된 대학도 있었음)

과학에서 한 과목, 사회에서 한 과목을 선택하면 되었는 데 예비고사에서는 전과목을 시험보아야 했다.

입시에 필요한 과목만 골라서 공부했던 터라 전과목을 보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었다.

예비고사 시행의 발표가 10월에 이루어졌으니 재수생들의 혼란은 말할 수 없었다.

한달 남짓한 동안에 공부하지 않았던 과목까지 공부를 해야 했다.

전에 실시되었던 국가고사 문제를 토대로 제작된 문제집으로 벼락공부를 해야 했다.

동기들 중에는 예비고사 실시 정보를 몰라서 응시하지 못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친구들도 있었다.

 

필자는 운좋게 합격을 하여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재수할 때 공부를 하지 않아 먼저 응시했던 대학교에 다시 도전할 자신감이 없었고, 가정형편 때문에 사립대에 진학할 수 없어 지방 국립대에 진학을 했지만.

 

1회 예비고사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기억나는대로 써보고자 한다.

예비고사 과목은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실업(농, 공, 상, 가정 등에서 택1) 6과목이었고 과목당 60점씩 360점 만점이었으며 커트라인은 150점대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1969년 12월 19일 첫 실시된 예비고사에서는 응시자 11만2436명 중 6만3215명이 합격했다고 한다.

서울의 일부 명문고는 100%가까운 합격율을 보였지만 지방에서는 1명의 합격자도 배출하지 못한 학교도 있었다.

강원도는 30%초반의 낮은 합격율로 전국 최하위의 성적을 기록해서 비상이 걸렸고 도교육위원회 차원의 학력 제고 노력으로(이 과정에서 여러가지 웃지 못할 파행현상과 부작용도 있었다) 나중에는 합격율이 상위권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첫번째 예비고사는 수작업으로 채점을 했는 데 서울교대생들이 채점을 했다고 한다.

필자의 동기가 서울교대에 다니고 있었는 데 재수한 몇몇 친구들의 성적을 기억하여서 말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성적 통계는 서울여상 학생들이 맡았다고 하는 데 제 2회 예비고사때부터는 전자계산기를 이용한 채점과 통계처리를 했다고 한다.

당시 서울의 중위권 이상의 대학과 도청소재지의 국립대 등 지방 상위권 대학을 제외한 많은 중하위권 사립대학들과 일부 교육대학의 미달사태가 속출하여 예비고사 합격증만 제시하면 3월말까지 신입생을 모집하는 신문광고가 이어지기도 했다.

 

아래는 필자의 제 1회 대학입학 자격 예비고사 합격증이다.

 

 

 

위에서 우하단에 사인이 찍힌 남규욱은 당시 강원도 교육감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