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훈장이 만난 사람들

보고 싶은 친구 박명각군

시골 훈장 2014. 9. 1. 22:49

1965년 춘천고등학교 40회가 되는 우리 동기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강원도에는 시단위에만 인문계 고등학교가 있었고, 인문계 고등학교가 없는 군이 많았기 때문에 인문계 고교에 진학을 하려면 인근 도시로 유학을 해야 했다.

당시 춘고는 8학급 480명을 모집하였다.

전체 신입생의 70% 정도는 춘천중학교를 졸업하였고 30%는 각지에서 모여 든 학생들이었다.

홍천, 인제, 양구, 화천, 가평 등 인근 지역에서 유학을 온 경우도 많았지만 외지에서 형이나 누나의 집에 와서 다니는 경우도 많았다.

춘천에 집이 없으면 도시에서 직장에 다니거나 결혼해서 사는 형이나 누나집, 큰댁이나 작은댁, 이모나 고모댁 등에 와서 다니는 경우도 많았다.

나도 입학초기 얼마 동안은 작은 고모댁에서 다니다가 우리집에 춘천으로 이사를 와서 집에서 다니게 되었다.

우리집에도 사촌들과 조카들 같은 과 동기인 친구까지 여러명이 우리 형제들과 부대끼며 학교에 다녔다.

 

박명각(朴明珏)이는 홍천 양덕중학교를 졸업하고 춘천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시골중학교지만 전교서 5위 이내의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였다.

나는 2반에 명각이는 5반에 배정이 되어 처음부터 같은 반은 아니었다.

나는 효자동 지금 법원 인근에 살았고 명각이는 지금은 약사천 가에 살았기 때문에 약사리 고개를 넘어 학교에 오가는 방향이 같았기 때문에 통학하면서 사귀게 되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둘은 금방 친해지게 되었다.

명각이는 재혼을 하셔서 연세가 높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셋이서 개울가 단칸방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전에 한약상을 하셨지만 연세가 높으셔서(당시 기준으로) 경제활동을 하지 않으셨고 어머니가 행상을 해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명각이는 물리 과목을 좋와했고 성적도 우수했다.

2학년때인가 명각이네 집에 갔다가 책꽂이를 보니 물리 참고서가 8권이나 되었다.

1,2학년때도 줄곧 전교에서 5위 안에 들었다.

3학년때 같은 반이 되었다.

학교에서 자며 공부한다고 몇몇 친구들이 음악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밴드부 개인 연습실에서 잠을 자며 공부를 했다.

창고에 있는 헌 책걸상을 가져다 놓고 공부를 했다.

명각이와 나는 둘이서 같은 방을 쓰게 되어 더욱 친해지게 되었고, 명각이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 보았기 때문에 그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졸업을 한 밴드부 선배들이 찾아와서 야간에 연습할 시간을 빼았는다고 몰아붙였지만 담당 선생님의 엄명에 의해 우리는 계속 밴드부개인 연습실을 사용했지만 5월이 되어 도서실로 이동을 했다.

 

명각이는 아주 승부욕이 강했다.

전교 1등을 못하면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그러나 전교 1등은 서울대 문리대 화학과를 나와서 외국어대 화학과에서 교수를 하고 있는 김형래가 주로 차지하였었다.

명각이는 전교 1등을 차지하기 위해서 거의 쉬는 시간이 없이 공부에 몰두하였다.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육군사관학교에 진학을 하려 했으나 2차 시험에서 탈락하였다.

당시에는 예비고사가 없이 대학을 진학핟 때였다.

명각이는 사범대학 물리교육과에 나는 국어교육과에 응시하였으나 명각이는 합격하였고 나는 불합격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다음해 내가 지방국립대인 춘천농대(지금의 강원대)에 입학했으니 하나는 서울대생이, 하나는 당시로서는 알아주지 않는 지방 국립대생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둘의 우정은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주로 서울에 올라가는 길에 명각이를 만났다. 둘다 가난했기 때문에 점심으로 자장면을 같이 먹고 돈은 각자가 지불했다.

명각이는 입주 과외를 하며 학교에 다녔다.

3학년때인가 부모님을 서울로 모셔가서 과외를 하며 부모님의 생계까지 담당을 하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동숭동 대학본부(지금 서울대 병원 인근 어디) 구내에 각자의 이름에서 한자 씩을 따서 '정영사'라는 기숙사를 만들어 성적이 우수하고 집안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숙식을 제공하였다.

명각이는 정영사에 입사하였다.

이곳에 거주하면서도 명각이는 과외를 하여 부모님의 생계를 담당하였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ROTC에 지원하여 ROTC 훈련을 받으며 과외를 하면서도 과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한 과목을 제외하고 전과목 A학점을 받았다고 했다.

이 기록은 후에도 오랫동안 서울사대에서 깨지지 않았다고 한다.

교과 업무 관계로 명각이의 사범대학 동기와 몇년 후배들을 만난 일들이 있었는 데 다른 과 출신들도 모두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또 내가 명각이의 동기라고 각별하게 대해 주었다. 위의 이야기도 이분들에게 들은 이야기다.

 

명각이는 다재다능한 재주를 가졌다.

그가 4학년(내가 3학년)때 서울사대에서 묵화와 서예 개인전을 열었다.

명각이가 묵화를 그린다는 것은 나도 몰랐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묵화를 배웠다고 했다.

아마 사군자를 그렸던 것 같다.

학내에서 열린 전시회는 성황을 이루었다. 김성근 당시 사대 학장이 직접 방문하여 방명록에 첫번째로 이름을 남겼다.

 

내가 3학년(명각군이 4학년) 때인 어느날 명각이가 편지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마쳤다고.......

명각이는 졸업을 하고 ROTC로 입대를 했다. 그러나 한두번 연락이 오더니 연락이 두절되었다.

소식이 궁금했지만 알 수가 없었다.

명각이를 둘러싼 온갖 소문이 떠돌았다. 심지어는 미국으로 차출되어 가서 특수훈련을 받는다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제대를 했을 터인데도 연락이 없었다.

 

내가 졸업을 하고 대학원에 다니다가 군에 입대하였다가 신병으로 귀향을 당하고 다음해 6월에 교사로 발령을 받아 근무하게 되었다.

1975년에 명각이의 소식이 궁금했던 나는 서울대 물리교육과 조교 앞으로 명각이의 근황을 알려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뜻밖에 명각이가 보낸 답장이 왔다.

군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는 중 폐디스토마가 발병하여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고 전역하였다고 했다.

각혈도 하고 몸이 허약해져서 걷기조차 힘들었지만 겨우 회복되어 서울대 물리교육과에서 조교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여름방학을 하자마자 서울대로 가서 명각이를 만났다.

이때는 동숭동에서 관악캠퍼스로 막 옮겼을 때였는 데 아직 조경이 덜 되어서 황량한 느낌이 들었다.

그해 가을 교제 중이던 아내와 같이 명각이네 집을 방문하였다.

그는 어머니와 둘이서 관악캠퍼스 인근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우리가 방문하였을 때 어머니와 그는 결혼문제로 의견이 대립되어 크게 다투었다.

명각이의 어머니는 내가 저녀석을 어떻게 길렀는 데 어미 말을 거역하느냐고 하소연을 하였고, 명각이는 내가 결혼하는 것이지 어머니가 결혼하는 것이냐고 대꾸를 하였다.

결혼을 약속한 아내와 같이 방문하였던 나는 누구를 편들어 말할 처지가 못되어 원론적인 답변만 하고 말았다.

 

1976년에 명각이는 서울시내 전농여중으로 발령을 받아 근무하였는 데 학습자료를 출품하여 전국대회에 입상하기도 했다.

1977년 그는 결혼을 하여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시간주 웨인 주립대학교에서 석사학위 과정을 마치고 워싱턴 주립대학의 박사과정에 입학을 했다.

그는 내게 보낸 편지에서 미시간 주에서 워싱턴주까지 5일간 차를 운전하여 도착했다고 했다.

내가 놀랜 것은 자동차로 닷새동안이나 걸려서 횡단할만큼 미국이 넓다는 것과 그가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자가용을 소유한다는 것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엄두도 내지 못할 시기였다.

 

'80년 전두환 정권이 대학정원을 확 늘리고 대학졸업정원제를 실시하면서 교수자원이 크게 부족하게 되었다.

석사학위를 소유하기만 해도 대학으로 갈 기회가 열려있던 시기였다.

나는 당시 강원대 자연대학장을 하시던 은사이신 홍순주 교수에게 명각이 이야기를 했더니 속히 연락을 하라고 하셨다.

명각이에게 편지를 했으나 묻는 말에는 답하지 않고 안부만 전해 올 뿐이었다.

다른 친구에게 들으니 서울대가 아니면 국내에서 일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다가 일이 힘들다는 내용의 편지를 끝으로 연락이 두절되었다.

강원대 농대의 송교수님이 미국에 갔다가 만났었는 데 그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하소연했다고 했다.

그리고 20년 가까이 연락이 두절되어 소식을 모르고 지냈다.

 

2000년 7차 교육과정 교과서 검정 관계로 출장을 갔다가 명각이의 스승이신 박승재 교수님을 만나 명각이의 소식을 여쭈어 보았더니

5년전인 '95년쯤 다니러 왔다가 박교수님에게 들렸다고 했다.

미국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어려움이 많다고 말하였다고 했다.

박교수님께 연락처를 알 수 있느냐고 하였더니 그가 연락처를 남기지 않고 갔다고 했다.

아마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다녀 가지 않았는가 하는 추측이 들었다.

 

그후에도 명각이에게서 일체 연락이 없었다.

워낙 자존심이 강한 그가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면서도 친구들은 물론 어머니에게까지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던 그가 미국에서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하자 일체의 연락을 끊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명각아 보고 싶다.

40년 가까이 소식이 없었다. 너도 많이 변했겠다.

이제 우리가 살 수 있는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적게 되었다.

살아온 길이 목표를 이루었으면 어떻고 못 이루었으면 어떠냐?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날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으나 건강이 있을 동안 서로 연락하며 지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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