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장, 시평, 논문

김현승 시의 주제의식이 변모․발전되어 가는 양상에 관한 연구

시골 훈장 2013. 9. 29. 23:22

 

Ⅰ. 序論

30년도 훨씬 넘는 오랜 시간 전이라 언제 어디서 읽었는지 확실한 기억은 없지만 筆者는 金顯承이 쓴 한편의 글을 읽고 큰 충격에 빠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基督敎 信者였다는 한 詩人이 자신이 平生 믿어 온 基督敎 신앙에 대하여 懷疑를 하는 내용의 글을 발표한 것이다. 지금 具體的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고백은 筆者에게는 신앙의 부정으로 받아들여졌고,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筆者의 종교가 基督敎이고, 그때 받았던 충격이 컸기에 金顯承이라는 이름은 筆者의 腦裏 속에 깊이 刻印되었고, 그후 그와 관련되는 記事를 접하면 관심을 갖고 읽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에 관한 기사는 그가 基督敎를 바탕으로 詩創作을 한 詩人이라는 것이었다. 이 또한 筆者에게는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가 基督敎를 부정한 것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고교시절 筆者는 國文學을 공부하리라고 결심하였었다. 그러나, 師範大學 國語敎育科를 지원하였다가 落榜을 하고 당시의 流行을 따라 自然界로 進路를 바꾼 후 化學 계통의 학과로 진학하여 졸업한 후 국어와는 관련이 먼 高校 化學과 中學校 科學을 가르치면서 30년을 넘게 지냈다. 그러다가, 어느 날엔가 문득 소년시절의 꿈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그때 이루지 못한 꿈을 뒤늦게나마 조금이라도 이루고 싶어서 國文學科에 編入하였는 데 金顯承 詩의 主題 意識의 變貌에 관한 주제로 현대시론 과목의 과제를 賦與받게 되어 감회가 새롭다.

 

茶兄 金顯承은 1913년 平壤에서 출생하였는 데 그의 부친은 牧師로, 그는 基督敎 가정에서 출생하여, 基督敎 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이러한 성장과 교육의 배경은 그의 시정신이 基督敎 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게 된 토대가 된다.

茶兄은 光州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평양에 있는 基督敎 학교인 숭실중학교를 거쳐 1932년 숭실전문학교 문과에서 입학한다. 그러나, 위장병으로 인하여 휴학을 하였다가 복학을 하는 등 학교 생활이 순탄하지는 못하였다. 1934년 그가 쓴 두편의 장편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와 “이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가 양주동교수의 추천으로 동아일보에 게재됨으로 등단하게 된다. 그러나, 持病인 위장병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다시 휴학을 하여 광주로 와서 숭일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게 되는 데, 일제에 의해 思想犯으로 檢擧되어 拷問을 받고 裁判을 받는 등 試鍊을 겪게 되고, 일제의 압력으로 교사직에서도 물러나게 된다. 이때 결혼을 하게 되고, 다시 숭실전문학교에 복학을 하려 했지만 신사참배 반대로 학교가 폐교되자 복교를 하지 못하고 평안도의 산골 사립학교 교사가 되지만 이곳에서도 오래 근무하지 못하고 금융조합 서기, 일인이 운영하는 피복회사의 사원 등으로 전전하다가 해방을 맞게 된다. 그가 일제에 검속된 후부터 해방을 거쳐 朝鮮大 副敎授로 赴任할 때까지의 기간은 거의 試作활동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던 시기로 볼 수 있다.

해방이 되자 茶兄은 숭일중학교 교감 등을 역임하다가 1951년 조선대학교 부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시작활동이 재개되었으며 新文學과 詩精神이라는 잡지를 통하여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게 되고 이때 발표한 대표작 중 하나가 「눈물」이라는 詩다. 「가을의 기도」, 「다소곳한 겸허」, 「반성의 기도」등도 이때 발표된 작품이다.

1957년 문학사상사에서 첫시집 「金顯承 詩抄」를 내었다.

1960년 母校인 崇實大 敎授로 부임하고 1965년 전가족이 서울로 이주한다.

이 시기인 1963년에 그의 두 번째 시집 「擁護者의 노래」가 출판된다.

 

그러면서 그의 詩世界에 변화가 일어난다. ‘60년대 후반에는 지금까지 추구하던 내면의 세계에서 ‘孤獨’을 발견, 이의 본질 추구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 ’孤獨‘에 대한 관심은 지금까지 堅持하여 온 基督敎의 세계관과는 背馳되는 것이었다. 이때 발표된 대표적인 시가 「堅固한 孤獨」이다.

이 때 그의 세 번째 시집인 「堅固한 孤獨」이 1968년 관동출판사에서, 1970년 성문각에서, 네 번째 시집인 「絶對孤獨」이 출판된다.

이 시기에 그의 대외적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는 데 1966년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위원장을, 1970년에는 부이사장을 역임한다. 1972년에는 숭실대 문리과대학장에 임명되었고 1973년에는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한다. 1970년 高血壓으로 쓰러졌다가 회복되어 다시 활동을 하였으나 1975년 별세한다.

 

1970년 茶兄은 高血壓으로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난 후 인간의 限界와 虛無를 깨닫고 절대자인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다시 신앙을 회복하였고, 그의 詩世界까지 변하게 된다. 지금까지 추구하여 왔던 인간 중심의 세계가 아닌 ‘절대 지상’으로서 基督敎에로의 귀의와 신을 통한 구원의 간절한 몸짓이 담겨 있게 된다.

이때 발표된 대표작이 “新年祈願”, “知覺 - 행복의 얼굴”, “희망” 등이다.

基督敎 신앙을 본질로 펼쳐졌던 그의 시정신은 한때 懷疑로 흔들렸으나 다시 신앙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상으로 그의 생애와 詩의 主題意識의 變貌過程을 槪略的으로 살펴 보았으며 本論에서는 그의 시의 주제의식의 변모 발전 樣相을, 특히 그가 회심한 후인 ‘70년대 초반의 詩人 「마지막 地上에서」에 발표된 시를 중심으로, 시 속에 나타난 그의 基督敎 신앙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 本論

조태일은 茶兄의 일생을 통한 詩的 작업을 人間 中心의 世界觀과 神中心 世界觀에서 파악하고 그 중심의 위치에 따른 詩人의 삶과 詩精神의 變貌를 제 1기(1034년 등단 ~ 1936년), 제 2기(1945년 ~ 1963년), 제 3기(1963년 ~ 1970년), 제 4기(1970년 ~ 1975년)으로 나누었는 데, 本稿에서는 이 基準을 따라 그의 삶과 시정신의 변모를 서술하는 데 특히 그가 信仰의 회심을 한 후 쓴 작품들을 중심으로 茶兄의 시속에 나타난 基督敎 信仰을 중심으로 그의 시의 주제의식을 고찰하여 보고자 한다.

================================================

 

이어지는 내용은 첨부파일을 참조.

위의 리포트는 2006년 10월 18일 한국 방송통신대 국문학과 3학년 2학기 과제물로 제출한 리포트임.

 

리포트.hwp

 

리포트.hwp
0.07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