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실크로드에 철마는 달릴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님이 서거하셨다.
김대중 대통령님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자가 아니었지만 그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왔던 나에게 김대중 대통령님의 서거는 큰 슬픔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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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김대중'이라는 이름을 처음 안 것은 고등학교때였다.
당시 제일 야당이던 신민당인가에서 활발한 원내 활동을 하던 김대중의원의 이름을 신문이나 라디오를 통해서 접할 수 있었고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1967년 6월 8일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최대의 관심사는 전남 목포였다.
김대중의원의 잠재력을 알고 그의 국회 진출을 좌절시키려 했던 공화당에서는 체신부 장관을 지낸 김병삼씨를 대항마로 출마시켰고 인적 물적 지원을 목포에 집중시켰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목포에서 개최하는 등 총력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결과는 김대중 의원의 당선이었다.
당시 고3이던 나는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말고 친구들과 같이 라디오로 개표방송을 들으며 김대중 의원의 당선에 환호했던 기억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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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대통령 선거때 유세를 온 김대중 후보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김대중 후보가 유세를 마치고 퇴장하는 길에 서서 그분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우리 앞을 지나며 '학생 동지들 투쟁을 부탁합니다"라는 육성을 들었을 때 감격은 지금도 새롭다.
그러나, 금권 관권 선거로 낙선의 고배를 마셨고 그후 유신과 망명, 납치와 연금으로 이어지는 고난을 겪었다.
10.26사태로 봄을 맞이 하는가 했지만 전두환의 폭거로 군부독재가 재등장하고 김대중은 내란음모라는 죄목을 뒤집어 쓰고 사형선고까지 받게 된다.
'80년 8월 공무원 교육원에서 새마을 교육을 받았는 데 교육 시간에
'김대중 사건의 전말'이라는 시간이 있었고 김대중이 일본에서 북괴의 지령을 받는 단체인 한민통의 후원을 받았느니, 해방후 좌익이었느니 하는 세뇌교육을 받았다.
심지어는 김대중이 김씨가 아닌 사생아라는 교육까지 받았으며 이는 김대중선생이 해금되고 나서 대선에 출마할 때마다 루머로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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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金이 나서 모두 낙선하고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고
정계를 은퇴하고 영국으로 가는 등 우여곡절을 거쳐 대통령에 당선된다.
김대중 대통령님의 큰 치적은 IMF의 경제난 극복과 남북 정상회담으로 표현되는 햇볕 정책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꿈꾸었던 커다란 꿈이 철의 실크로드다.
부산을 출발한 기차가 북한을 거쳐 시베리아나 중국을 거쳐 중앙아시아를 횡단하고 유럽을 거쳐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에 이르는 철의 실크로드를 그는 꿈꾸었다.
그러나 북한의 비협조와 그후 남북관계의 경색으로 아직 철의 실크로드는 실현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김대중 대통령이 꿈꾸었던 철의 실크로드가 실현되어 부산에서 출발한 기차는 북한을 거쳐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여 힘차게 달릴 날이 올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님의 꿈이었던 철의 실크로드가 속히 실현되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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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8. 22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 후 한겨레 토론방에 올린 글